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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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

황정아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그간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 같다는 탄식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고유명사를 붙여 호명하기도 괴로운 바가 있어서 ‘새’ 정부라 쓰고 보니 그것은 그것대로 참담한 기분이다. 무언가 새로운 점이 있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전에 없던 괴로움이지 싶다. 이 정부의 부패와 무능과 무책임은 10‧29참사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숱한 죽음을 비롯한 물리적 폭력의 고통을 국민들에게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놀랍도록 노골적이고 뻔뻔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신적‧감정적 시련이기도 했다. 듣는 귀를 의심할 정도의 거짓말, 눈 뜨고 보기 힘든 엽기적 행태들도 그런 시련의 일부지만, 어쩌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우리의 시련이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깊다. 미적대는 개혁의 발걸음을 이제야말로 재촉할 시점이었기에 고통의 체감 정도는 한층 배가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명박정권 초기에는 일말의 실용주의는 있으려나 하는 기대가 잠시나마 있었다. 또 선거결과에 대한 커다란 실망 속에서도 박근혜정권 초기에는 보고 배운 겉치레라도 번드르르하려니 하는 환상이 없지 않았다. 그와 같은 눈곱만큼의 오해나 환상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이 정권의 또다른 새로움이라면 새로움이다. 1회차 3분 만에 스토리가 다 드러난 드라마처럼 과연 어떻게 되나 두고 보지 않고도 남은 임기가 어떠할지 그려지고도 남는다. 예상되는 온갖 해악과 파탄의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갈 것이 훤하니 울화와 분노만을 자극하는 이 뻔한 막장드라마는 역시 조기종영이 합당한 결말일 것이다. 요컨대 굳이 지지율을 언급하지 않고도 이 정권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판단은 진작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판단이 끝났다 해서 곧장 효력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데 제도가 갖는 완고함이 있지만,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란 어떤 제도의 틀보다 강력하고 유연하기에 이 민의가 구현될 방도는 조만간 찾아지리라 믿는다.

 

정권의 해악은 우리가 소중히 발전시켜온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가치들을 무너뜨리려 하는 데 멈추지 않고 그것들이 ‘소중하다’는 감각 자체를 훼손하려는 데까지 미친다. 법 바깥에서 활개 치는 독재는 법치의 중요성을 도리어 깨우치게도 하지만 법을 범죄적으로 집행하는 유형의 독재는 법치의 의미에 염증을 느끼게 한다. 10‧29참사 이후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급조하여 정확히 애도의 본뜻을 흐리려했듯이 말이다. 우물에 독을 푼 다음 맑은 물이란 애초에 없다고 우기려는 이들의 행태가 더할 수 없이 투명하게 전시되는 지점은 다름 아닌 그들의 ‘말’이다. 대통령실, 검찰 할 것 없이 정부기관이 내놓는 발언에 거짓이 없는 날이 하루라도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거짓말은 이 한심하고도 사나운 정부가 즐겨 구사하는 폭력기제이자 ‘구조적’ 통치기제이다. 진실과 양립할 수 없는 권력임을 일러주는 이 사실에서 진정 섬뜩한 일면은 거짓의 압도적 유통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속내이다. 거짓임이 자명한 거짓말이라도 비웃고 넘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도권 언론에 대한 분노가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도 이처럼 거짓과 싸우는 일이 민주주의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짓의 증폭장치를 자처함으로써, 또 때로는 ‘외람’될까 질문을 생략함으로써, 다수의 기성언론은 정권의 ‘부역자’라는 비난을 자초한 것은 물론이고 종국에는 누구도 ‘언론의 자유’라는 표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이 모든 것이 정말 가치를 무너뜨리고 역사를 되돌리는가? 언론의 자유에 일어난 일만 놓고 보더라도 오늘의 어이없는 상황이 실은 배울 만큼 배웠다 생각한 민주주의를 다시금 심화학습할 기회임을 알게 된다. ‘시장의 자유’가 무자비한 양극화의 다른 이름임을 이미 경험하고도, 또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연설을 통해 극적으로 공허해진 그 위상을 재확인하고도, 자유는 여전히 강한 아우라를 지닌 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언론의 자유라는 태도 앞에서 우리는 마침내 허울로서의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으며 진실의 추구가 민주주의의 더 기본적인 요소임을 날카롭게 깨우친다. 그나마 진행된 변화마저 되돌리려는 시도 덕분에 오직 대담한 개혁이야말로 흔들리지 않을 개혁임을 알게 되듯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흐리려는 기획은 거듭 의미를 갱신하는 민주주의만이 살아 있는 민주주의라는 인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웹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이즈음 자주 보이는 특징으로 ‘회귀’라는 장치가 있다. 철저히 패배한 현재를 만회하기 위해 ‘지금 내가 아는 것’을 자산으로 간직한 채 과거로 돌아가 성공적 삶을 설계하는 스토리이다. 이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개 패배의 처절함과 거기서 비롯되는 원한감정의 강렬함으로, 그 고도로 집중된 에너지가 하늘을 움직여 회귀의 기회를 얻는 식이다. 이런 성공서사가 깊은 무력감의 다른 표현이며 우리 사회의 어떤 증상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은데,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사실 우리는 미래가 어떨지에 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외면이 가져올 결과, 남북관계의 파탄이 야기할 비극, 그리고 그보다 가깝게는 이 정부의 지속 불가능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미 ‘회귀’한 사람들이며,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확신으로 현재를 바꿀 수 있다. 다만 패배의 처절함과 원한의 강렬함에 버금가는 강도의 지향과 희망, 당장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오래 열렬히 싸웠기 때문인데, 이제 잠깐의 좌절을 털고 서로를 격려하며 이미 시작된 크고 작은 싸움들을 북돋울 시간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2023.2.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