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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다드래기

영화 「다음 소희」의 개봉 소식을 보고 관심을 가져달라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한동안 최선을 다해 외면했다. 만화가가 되기 전 7년의 콜센터 생활을 함께한 옛 동료 중에 누구도 이 영화를 보려 들지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을 감정 없이 건조하게 따라가는 시선이 좋았다는 관객의 반응이 있었지만, 나는 한시간이 채 되기 전에 숨이 찼고 어떤 상황에서는 귀를 막았다. 앳된 소희(김시은 분)의 밝은 웃음과 점점 낮아지는 통화 목소리는 머릿속에 많은 파노라마를 만들었다. 7년간 ‘어제 소희’였던 나에게 ‘다음 소희’의 현장은 건조하지 않았고 복기되는 고통이었다.

 

‘마지막 화이트칼라’ 콜센터

 

구직난은 시대의 과제라지만 생산활동이 극적으로 떨어지는 지방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은 수도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일부 광역시에서 여성 구직난 해결을 위해 공을 들인 일 중 하나가 거점지역 콜센터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청소년인 소희는 콜센터에 ‘현장실습생’으로 취업한 후 “나도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다”라며 좋아한다. 이 ‘사무직 여성’이라는 특성이야말로 콜센터 업무의 치명적인 장점이자 단점이다. ‘마지막 화이트칼라’라고도 칭해지는 이들의 업무는 범용의 전문성은 요구되지 않으면서 각 센터의 숙련에만 특화되어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많은 콜센터 직장인이 가지는 자부심은 ‘나는 스스로 열심히 벌고 있다’는 사실과 ‘어떻게든 제때 퇴근한다’는 위안이다. 콜센터는 정보 보안 때문에 근무시간‧근무지 외 잔업이 없다. 교대근무나 과도한 야근에 시달렸던 전문직‧생산직 경험자, 출산이나 이혼 등으로 기존 경력이 단절된 이들도 콜센터에 온다. 콜센터 경력자들이 재입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퇴근과 주말 휴무가 주는 안정감 때문이다. 구직자들의 그런 상황을 잘 아는 고용인들은 교육기간에 갖은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직능이 주는 ‘발전’은 있다. 미디어나 일상의 언어, 감정폭력이나 겉발림에 굉장히 단련된다.

 

노동과 책임의 외주화

 

‘현장실습생’의 존재는 비정규직 시장에서 ‘혁신적인’ 인력이다. 1년 근속을 채우지 못하도록 11개월마다 퇴직과 재입사를 반복하게 하거나 육아휴직 중 소속회사의 입찰 탈락으로 복직하지 못하는 파견직 콜센터 노동자의 이야기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시장의 흔한 전형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홈쇼핑, 서비스센터 등의 급부상으로 전화상담을 통한 고객 응대가 활발해졌고, IMF 외환위기에 퇴직 및 전보 조처를 받은 여성들이 본사에서 아웃소싱으로 운영하는 콜센터에 입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독립적인 채용, 인력파견을 거쳐 이제 성인도 아닌 청소년 현장실습생이 값싼 노동자로 투입된다.

 

「다음 소희」의 배경이 된 상담원 자살사건은 콜센터의 전반적인 아웃소싱이 이루어지고 2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후 발생했다. 오직 생산력과 결과만 중시하는 업무에서 사람들이 소모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경영의 위임이든 인력관리의 위임이든 본사와 명백하게 분리된 고객센터의 업무는 가장 곤란하고 직접적인 책임의 압력을 방어하는 것이다. 본사는 중요한 과제를 던진 후 해결한 결과만 가져오게 하고, 그 일은 사람이 한다. ‘지금 전화받으시는 분은 누군가의 가족입니다’라는 안내가 고객에게 향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담원의 고충은 시스템 문제가 아니라 블랙컨슈머 때문이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법정 최저임금 인상이 있을 때에야 기본급을 조정하려는 대부분의 콜센터에서 애초에 최저임금 기준도 다르고 인센티브를 주지 않아도 되는 현장실습생이란 얼마나 달콤한 독약인가. 물론 그 독은 실습생이 마시게 된다.

 

콜센터 인력시장의 취업 마케팅

 

보험사 일반상담 콜센터에 근무할 때였다. ‘콜마케팅학과’를 졸업한 사원이 입사했다. 경력직이 많은 센터였지만 4년제 ‘콜마케팅학과’가 있다는 것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학과에서는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어든(필요가 없어질) ‘텔레마케팅’을 공부한다고 한다. 해당 학교 외에 2년제 대학 중에도 콜마케팅과, 텔레마케팅과 등의 이름으로 관련 학과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케팅 전공 분야에서 텔레마케팅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고객이 원하는 감성적인 텔레마케팅을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학과 소개를 찾아보니 마치 요즘의 콜센터는 서비스만 제공하지 않고 판매, 관리, 시장조사 등 여러 전문성을 요구하며 그런 직종으로 변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콜센터 현장에서는 일정 기간 상담직을 수행하며 실무 경험을 익히고 우수사원으로 뽑혀 관리직으로 승진했을 때나 그러한 ‘전문성’이 요구될 뿐이다.

 

콜센터 취업을 목적으로 한다면 고교 졸업과 동시에 입사하여 근무를 하는 편이 적응을 위해서도, 생각을 빨리 바꾸는 데도 훨씬 지혜롭다. 콜센터 상담원으로 인고의 세월을 되도록 영광스럽게 보내면 그제야 「다음 소희」의 이준호 팀장(심희섭 분) 같은 관리직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팀장이 되는 것은 소수일 거라는 예상도 가능하지만, 총괄 관리의 스트레스는 또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콜센터에서는 승진조차 서로 고사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콜센터에서의 근속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데, 학사학위나 대학 졸업장이 그 기간 동안 근속으로 겪어야 하는 고충을 대체해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과들의 주요 목적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콜센터 취업’일 뿐이다. 해당 학교는 ‘4년제 대학 취업률 1위’를 슬로건으로 걸고 있었다. 대학과 기업의 산학협력과 함께 지역에서는 업무강도나 근무환경에 있어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아온 센터들이 해당 학과 졸업생들을 ‘인턴’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졸업생들이 인턴을 거쳐 사립학교 학자금대출을 갚을 정도로 근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학교에서 중요한 것은 취업률이지 퇴사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 짧고 폭력적인 말이다. 오늘날을 비관적으로 칭할 때 내가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직업’이라는 말을 빌려 쓰지만, 실은 사람의 귀함에 대한 인본주의를 논하는 말이다. 이제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사람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결여다.

 

콜센터 노동자가 고객에게서 흔히 듣는 멸시 중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그런 일 안 했지’가 있다. 이런 멸시는 단순한 욕설이나 성희롱보다도 마음을 훨씬 착잡하게 한다. 콜센터에 오게 된 이들의 다양한 전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곳은 감히 모든 종류의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난하고 공부를 못하고 기술이 없어도 내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경력단절로 과거의 영화를 추억으로 뒤로한 사람, 생계수단이 필요한 예술가, 불우한 가정에서 탈출하기 위해 경제적 독립을 결심한 사람까지 삶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이들이다.

 

마이스터고에 진학하고 직업반을 택하는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는 또 어떠한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소희의 친구들은 모두 고용불안정에 노출되어 있다. 학교는 마치 사회의 쓴맛을 미리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현재의 노동세계를 축소해놓은 듯한 모습이다. 단순히 다정함과 따뜻함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시장의 숱한 부당한 조치에 원성을 터뜨릴 때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쿨’한 대응처럼 보이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완강한 의지가 비웃음거리가 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취업시장의 약자들을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만든다. ‘공부가 싫으면 공장에 가라’는 소리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야 한다.

 

전업 만화가가 되면서 근로소득자가 아닌 프리랜서 노동으로 또 새로운 맛을 많이 보고 있다. 요즘 나는 ‘직원도 아니면서 복리후생을 바란다’ ‘노동자도 아니면서 노동자라고 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사람들이 화풀이를 위해 누구 하나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 없는지 찾아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일들이 일어나는 시대에 그 비웃음도 영원할 수는 없다. 노동시장 전반이 교묘한 방법으로 근로기준법을 피해갈 수 있도록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만큼이나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나와 상관없는 일로 시작된 것이 결국 내 삶에 침투한다. 약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동정과 다정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부실한 다리 하나가 부러지면 많은 것이 무너진다. 결국 서로 존중하는 태도만이 나의 자리까지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다드래기 / 만화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자살유가족동료지원활동가

2023.3.2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