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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지 못할 너를 찾아서: 한국의 학교폭력과 폭력의 굴레

이하나

한국의 어린이들은 주로 다섯살부터 집단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위한 기초과정을 배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요. 양보해요. 친구의 것을 빼앗지 않아요. 나쁜 말을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칭찬을 받고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착한 어린이들이 자라 학교폭력의 당사자가 된다. 충격적인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분히 폭력적이면서 평화를 기원한다고 나는 믿는다.

 

학교폭력 피해자의 유형은 특정하기 어렵다. 체격이나 성격 등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것이나 타고난 것을 꼬투리 잡아 공격하는 가해집단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가해자의 특성도 규정된 게 없다. 학교폭력은 학교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 의해 벌어질 수 있다. 학생, 교사, 학부모, 학교폭력대책위원, 누구나 가능하다.

 

우발적으로 분노조절에 실패하거나 스트레스에 휩싸인 아이가 일시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비전문가들이 회의를 거쳐 섣불리 그 폭력성에 낙인을 찍기도 한다. 한번의 폭력성은 그 지역을 떠날 때까지 꼬리표가 된다. 경미한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학교장에게 처분 권한을 준다. 사안의 경중도 학교에서 정한다. 학교폭력은 모두 ‘처분’과 ‘처리’로 종결된다. 그곳에 용서, 참회, 화해라는 말은 없다.

 

초등학교에서의 학교폭력은 주로 따돌림으로 시작된다. 한마을에 살며 교실에서 뒤엉키는 아이들 사이에 힘의 우열은 명확하지 않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도 뒤죽박죽이다. 그러다 어딘가 어긋나는 순간,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한명이 해보고 두명 세명이 된다. 집단을 이루어 누군가를 놀려도, 괴롭혀도, 물건을 빼앗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폭력이 자신의 무기가 된다는 걸 감지한 아이들은 대상자를 물색한다. ‘그래도 되는’ 아이를 찾아낸다. 툭툭 건드리거나 물건을 빼앗아도 괜찮은 아이. 피해자의 저항은 반복되는 가해에 점차 힘을 잃는다. 괴롭힘은 고의적이고 집요하며 계획적으로 진화한다. 가해자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괴롭혔다고 변명한다. 들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괴롭혀도 마땅한 사람은 없다. 마치 연쇄살인처럼, 그저 어떤 타깃을 잡았을 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킨다. 각 학교로 흩어지고 모이며 아이들의 성정과 성품이 달라진다. 학교 안의 서열이 뒤집힌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복수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이다. 아이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서열을 잡아간다. 등하굣길이 같은가, 어떤 차를 타고 학교에 오는가, 어디에 여행을 다녀왔는가, 어떤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가, 어떤 운동화를 신었는가를 보며 너와 다른 나, 나와 다른 너를 인지한다.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건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교실 안에 깔려 있는 서열의 무게는 무겁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 너는 쓰레기라고 경고하는 세상이 이미 폭력이다. 아이들은 네가 될 수 없는 나를 확인한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유능한 아버지가 없다면 퇴직금 50억원은 받을 수 없고, 기를 쓰고 애써봤자 내 부모 세대보다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다. 미래는 암담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생긴다. 돈이 필요하고 놀잇감도 필요하고 화풀이 대상도 필요하다. 중학교 이상에서는 약탈적 학교폭력이 늘어난다. 폭행은 약탈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공간도 넓어졌다. 교사와 동급생이 지켜보는 교실보다 더 간편하고 숨기 좋은 온라인 공간이 있다.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해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은 모두의 눈에 띌 수 있지만, 무자비한 밀렵꾼은 은밀한 공간을 찾아든다. 오래전엔 지하주차장이나 후미진 담장 아래였겠으나, 그보다 더 편리한 온라인 공간이 생겼다. 그러나 변한 건 없다. 그래도 되기 때문에 빼앗는 것이다. 과거엔 빼앗아야 할 것이 운동화였다면 지금은 데이터나 카카오톡 계정이 되었을 뿐이다.

 

SNS의 발달로 학창시절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유명인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의 학생들은 ‘흑역사’를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록은 증거가 된다. 그러나 어차피 장밋빛 미래 따위가 올 것 같지도 않다면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가 되어 오늘만 살기로 한다.

 

남의 것을 빼앗은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는 걸 자라며 깨우쳤다. 주가조작을 하더라도, 사기를 치더라도, 성폭행을 저지르더라도 권력과 돈이 있다면, 게다가 지능까지 겸비했다면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다고 사회가 가르쳐준다. 수백 수천명을 학살하거나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도, 뇌물을 바쳐 수백억의 부당한 이익을 보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아 무고한 생명이 죽어도 다들 잘 산다. 권력과 돈을 쥐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건 세상이 알려주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가해자와 분리되었지만 피해의 기억을 잊지 못한 자들이 골목마다 남아 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칼은 날이 둔해졌지만, 비슷한 것만 봐도 번뜩이기 마련이다. 비록 나는 복수하지 못했지만 너를 괴롭혔다는 저 사람을 응징할 수 있다면, 나도 사람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가해자들은 늘 기억이 나지 않고, 피해자는 용서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교실에서 청문회장까지, 그것들은 하나같이 똑같다. 원래도 무리지어 다녔던 그들, 다 똑같은 그들이 가진 것 단 하나라도 빼앗고 싶다.

 

피해자에게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곳에서 피해자는 뒤늦은 정당방위에 뛰어든다. 복수는 끝이 있을 수 없다. 키보드 위에 손을 얹어 몇개의 문장을 쓰고 나면 나의 흉터를 먹고 자란 강인한 말이 남는다. 심장이 뛴다. 언어는 힘을 갖고 폭풍이 되어 과거의 가해자를 쓰러뜨린다. 그가 무릎을 꿇고 대중 앞에, 내 앞에 조아린다. 그러다 모니터에서, TV 화면에서 더는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 피해자였던 어린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세월이 지나 비슷한 자에게 복수하는 게 뭐 그리 나쁘냐고 이들은 묻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여행이 시작된다. 죽을 때까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그날의 가해자를 찾아서. 너나없이 참전하는 이 지독한 복수전은 진실을 규명하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 때에야 화해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야 끝난다. 대한민국은 충분한 화해의 역사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너를 찾는 여행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하나 /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2023.3.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