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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돌봄위기는 체제전환의 계기이다

김창엽

돌봄이 이 시대의 화두로 굳어진 것 같다. 아니, 화두라기에는 안이하고 과제, 도전, 문제, 고민이 더 맞지 않나 싶다. 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요즘 유행하는 표현 ‘난제’(wicked problem)를 떠올릴 법하나 그 정도로도 모자란다.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출 노인돌봄에는 상투적이지만 ‘위기’라는 규정이 더 어울린다.

 

현실제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1977년 시작부터 치면 곧 50년이 되는 국민건강보험과 2008년 출발한 장기요양보험이 돌봄 재난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을까? 다들 걱정하는 대로 재정이 가장 큰 문제다.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면 필연적으로 재정수입도 감소하게 마련이고 지출은 더 빠르게, 아마도 상상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지속 가능성’이 없다.

 

재정 대책은? 국민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의 주 수입원인 보험료 인상만으로는 어림없다. 다른 이유보다 정치적 반발과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쓰지도 않는 보험료를 낸다며 청장년층의 반발이 커질 것이고, 지금의 국민연금 상황으로는 노인의 분담도 기대하기 힘들다. 정부가 일반 예산을 지출해 부족분을 메꿀 수 있겠지만 이는 국가재정 운용의 기본 틀을 바꿔야 하는, 말하자면 새로운 상상이 필요한 영역이 아닌가.

 

이 틈에 비교적 쉬운 정치적 해결책은 ‘개인화’이다. 즉 국민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이 책임지는 서비스의 범위와 대상을 줄이고 개인과 가족의 부담을 늘리는 것이다. 머지않아 닥칠 일을 상상해보자. 공적 사회보장체계(국민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의 재정이 부족할 때 ①보험료 인상과 ②대상자 및 보장 범위 축소라는 두가지 선택지만 있다면 우리 각자와 공동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후자는 공적영역을 축소시킴으로써 개인 부담 증가로, 나아가 탈공공화와 민영화로 이어지는, 장담컨대 극심한 돌봄 불평등을 초래할 ‘가파른 길’이다.

 

누가 돌볼 것인가? 주로 가족이 담당하는 비공식 돌봄이 아직은 훨씬 더 많지만, 앞으로는 사회적 돌봄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경제와 가족이 변화했고 이에 따라 문화와 규범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병원의 간병인처럼 비제도권에 있는 돌봄 제공자까지 사회적 돌봄의 제도 안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질 것이다. 재정 사정에 무관하게 돌봄의 제도화와 사회화 요구는 더 높아질 공산이 크다.

 

다시 지역사회에 관심이 쏠리는 경향도 주목해야 한다. 지역사회가 돌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에는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탈시설을 통해 돌봄의 공적 비용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에서 질 높은 생활과 인간적 돌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두 그럴싸해 보이나 이 두 가치는 현실에서 상충한다. 특히 어떤 돌봄을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지역사회에서의 돌봄이 자칫 개인이나 가족, 특히 여성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퇴행’이 되기 쉽다. 이리하면 보장성이 높으면서 질 좋은 돌봄은 불가능하다.

 

비공식 돌봄이든 사회적 돌봄이든, 돌봄노동은 주로 여성이 담당해왔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낮은 임금과 나쁜 노동조건은 이 노동시장의 부인할 수 없는 특성이다. 윤리적·규범적으로는 필수노동을 제대로 보상해야 하지만, 돌봄을 둘러싼 노동‘시장’은 돌봄노동자에게 불리하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데다 조금이라도 수익성이 떨어지면 이주노동자를 통해 공급을 더 늘릴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시장원리를 따르는 돌봄체제에서는 돌봄의 질이 확연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친밀한 관계’ 사이의 돌봄이 아니라는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여러가지 이유로 사회적 돌봄은 의료보다 품질을 보증하고 보장하기 더 어렵다. ‘좋은’ 의료의 결과와 비교해 ‘좋은’ 돌봄의 결과를 잘 알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지만, 돌봄 관계의 특성 때문에 질에 대한 감시가 약하거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 중요하다. 돌봄노동의 조건을 개선하도록 공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질 보증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

 

지금까지 현상의 제도, 재정, 노동을 따졌지만, 나는 의료와 돌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현상이 하나의 심층 구조에서 연유한다고 해석한다. 그 구조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로, 이 체제는 활기차고 건강하며 참여하는 삶을 지향하는 돌봄(의료를 포함한다)의 가치지향과 자주 충돌한다. 이 체제가 노인, 장애인, 홈리스, 완치가 어려운 환자,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이해와 이에 기반한 돌봄은 좀더 근본의 체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원리를 토대로 통합된 체제와 제도가 우리의 돌봄 경험을 설명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환자와 이용자는 더 좋은 간병, 돌봄, 의료를 원하지만 대부분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다. 병원과 요양시설의 행동과 기관운영 원리가 윤리보다는 경제와 경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논리로, 수익과 경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순위가 처진다. 행정관리, 감독과 감시, 처벌도 경제논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돌봄체제가(또는 돌봄 ‘레짐’이) 총체로서의 사회경제체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과 태도, 전문성, 윤리와 직업의식은 둘째다.

 

재정과 노동 두가지만으로도 희망이 잘 보이지 않지만, 나는 돌봄위기가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하는 ‘해방적 파국’(emancipatory catastrophe)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서 보험료 인상인가 축소인가를 물었지만, 제3의 대답은 지금 체제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지역사회 돌봄의 딜레마 또한 현재 체제 ‘너머’에서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과제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 ‘이후’를 모색하는 것이 곧 새롭고 해방적인 돌봄체제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동요하는 삶의 토대와 위기가 만날 때 새로운 체제의 기회가 생기는 법이다. 여기서 체제란 가령 이런 것이 아닐까. 최근 제니퍼 네델스키와 톰 말리슨이 제안한 대안은 ‘모든 사람이 파트타임으로’ 일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낸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 책의 부제가 ‘돌봄 선언’이다(Jennifer Nedelsky and Tom Malleson, Part-Time for All: A Care Manifesto, Oxford University Press 2023). 저자들은 실용적인 제안처럼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모두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세계란 어떤 사회경제체제여야 할까?

 

 

김창엽 /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사)시민건강연구소 이사장

2023.6.1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