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공산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으며 이들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말해 논란을 낳은 바 있다. 2022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은 (…)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하면 발언의 수위가 훨씬 세진 셈이다.
불과 일년 사이 윤석열 대통령의 입이 저토록 험악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통적인 보수층에 소구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런 계산이 없진 않겠으나 이를 단순히 정치공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윤대통령이 일종의 ‘확신범’으로서 저와 같은 발화를 이어가는 측면을 놓칠 수 있다. 후꾸시마 오염수 방류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와 관련해 윤대통령은 ‘단기적 논란으로 정치적 손해를 볼지라도 아랑곳없이 나의 길을 가겠다’는 태도를 꾸준히 내보이고 있다. 그럴 때 그는 모종의 근본적 신념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각에서는 그 신념의 출처로 2000년대 중반 이래로 활발하게 제출된 ‘뉴라이트’적 역사인식을 꼽고 있다. 현 정부의 요직에 ‘뉴라이트 운동’ 출신들이 여럿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도 그 근거로 작용한다.
세계를 ‘공산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의 투쟁으로 분할하는 저 신념은 윤대통령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공산전체주의의 위협에 맞서 국가의 운명을 구해내는 비타협적 지도자’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요인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 자신이 대통령 취임사에서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 반지성주의적 풍토를 획책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반지성주의
‘뉴라이트’적 역사관은 어떻게 반지성주의적 풍토를 획책하는가. 일본의 사상가 우찌다 타쯔루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는 “편협함과 무시간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우치다 다쓰루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 우치다 다쓰루 엮음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김경원 옮김, 이마 2016). 반지성주의는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편협하며 그 정답을 복잡하고 모호한 역사적 시간 속에서 궁리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라는 결과에서 도출하려 한다는 점에서 무시간적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은 뉴라이트적 반지성주의에 내재한 편협함과 무시간성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근대주의에 침윤된 뉴라이트 역사관은 한반도의 역사를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승리로부터 소급하여 의미화한다. 따라서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수립에 맥이 닿지 않은 다양한 역사적 맥락과 실천들은 그 자체로 이단적이고 불온한 것으로 몰려 삭제된다. 일제 식민지기 독립투쟁이 지녔던 다양한 지향과 실천 역시 자유민주주의라는 무시간적 절대이념의 잣대하에서 자의적으로 재단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또시는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전통에 대한 진지한 참여나 역사에 대한 깊은 사려가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는데 이는 윤석열정부의 반지성주의적 ‘역사전쟁’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가 주최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년 토오꾜오 동포 추도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윤미향 의원의 경우도 반지성주의적 역사관이 지닌 편협함과 무시간성의 위험을 보여준다. 여당에서는 “반국가세력과 대한민국을 위협”했다며 윤미향 의원을 제명하고 형사고발하는 안까지 검토 중이라며 펄펄 뛰고 있지만 총련의 역사를 반국가세력이라고 일소하는 태도야말로 식민과 분단의 역사에 대한 극도로 앙상한 인식을 드러낼 따름이다. 현실적인 불이익을 감내하면서도 대한민국 국적이 아니라 조선 국적을 유지하는 어떤 재일 동포의 삶에 대해, 남도 내 나라고 북도 내 나라라며 하루 빨리 남북이 힘을 합쳐 통일된 조국을 이루었으면 하는 그들의 바람에 대해,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북한 대표로 출전해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축구선수 정대세의 복잡한 심경에 대해 저 ‘반국가세력’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조금도 없다. 그와 같은 앙상한 정치적 구호는 이웃에 대한 앎의 충동을 불온한 것으로 몰아 금지시킴으로써 우리를 단순한 적대의 울타리 안에 가둬둘 뿐이다.
편협함과 무시간성을 넘어서
윤석열정부의 반지성주의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윤석열 개인이나 집권세력의 ‘수준 낮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라도 정부는 끊임없이 국민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들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반지성주의적 통치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떤 대상을 현재 안에서만 파악하려는 태도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실천하는 한 방법으로 소설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한국의 현대사와 맥이 닿아 있는 소설의 경우 권력이 기술하고자 하는 편협하고 무시간적인 공식 역사의 이면을 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이해와 지성을 한층 깊게 만든다.
가령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윤대통령 식으로 보자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한 ‘공산전체주의’ 맹종자일 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한 인간과 시대를 그런 폭력적인 규정으로 포획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지 깨닫게 만든다. 현기영의 근작 『제주도우다』(창비 2023)는 소년 안창세가 부르짖은 ‘조선 독립 만세’라는 해방의 외침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대한민국 만세’로 귀결되는 이야기다. 안창세가 외쳤던 ‘조선 독립 만세’에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새롭게 만들어갈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쁨이 담겨 있었지만 마지막에 살아남기 위해 외쳐야 했던 ‘대한민국 만세’에는 살육의 공포 앞에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너덜거리는 육신과 정신의 파편만이 있을 뿐이다. 두 작품은 모두 ‘자유 대한민국’의 무의식에 새겨진 원초적 상흔을 망각과 부인으로부터 구해내 우리 앞에 보존시킴으로써 우리가 거쳐온 역사적 시간에 대한 구체적인 실감을 부여한다.
슬라보예 지젝은 전체주의라는 관념은 “우리에게 사유할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거나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서술할 수 있는 통찰들을 열어주는 개념이기는커녕 우리를 사유의 의무에서 면제시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아예 생각이란 것을 하지 못하도록 틀어막아버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한보희 옮김, 새물결 2008). 윤석열정부가 공산전체주의라는 헌 칼을 휘두르며 노리는 정치적 효과 역시 시민들의 사유와 성찰을 틀어막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저항은 역사와 구체적 인간의 삶에 대한 더 깊고 면밀한 사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23.9.19.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