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김영란법과 그 적들: 추석에 생각하는 한국농업
‘김영란법’으로 익숙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청탁금지법)이 점점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추석을 앞두고 명절 전후 30일간 농수축산물의 선물 가격을 기존 20만원에서 30만원으로 상향조정하는 개정안을 지난 8월 의결했다. 2010년 현직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고가의 외제차와 금품이 오간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검사와 변호사 간 소송사건의 정보가 제공되었고 기소를 두고 거래까지 이루어졌지만 대법원은 이를 개인적 친분관계에 따른 금품수수로 대가성이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죄가 있어도 무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법조계의 공고한 카르텔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여론이 들끓자 박근혜정부마저도 청탁금지법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2016년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의 주도로 제정된 청탁금지법은 올해로 7년째를 맞는다.
청탁금지법은 직무 연관성이 있는 공직자와 공공기관단체 임직원, 사립학교 교직원, 언론사 임직원과 이들의 배우자들에게 보내는 선물과 경조사비의 상한액을 법으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시행이 예고될 때부터 축산(한우)과 과수, 인삼, 선물용 난초와 같은 화분꽃(분화)을 다루는 화훼업, 수산업 등 관련 단체장들이 반발했다. 이 법이 시행되면 농업이 붕괴될 것이라며 농수축산물만큼은 예외로 해달라는 요구가 끈질기다. 실제로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직후 2017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보고서 「청탁금지법 시행에 따른 농식품 분야 영향과 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보면 명절 선물용 한우, 과수 품목 등 주요 농축산물의 판매액이 약 25% 감소했다. 이는 농업단체들의 농업 피해액 산정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보고서의 핵심은 소비 트렌드의 변화에 맞춰 향후 농업 생산방식의 패러다임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부분은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반면 진보진영의 농민단체들은 피땀 흘려 지은 귀한 농산물이 뇌물로 쓰여야겠냐며 본질을 호도하지 말라 정면 비판한다. 명절에 농산물이 안 팔려 농업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농업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라며 날을 세웠다. 농산업에 대한 전망을 세우고 지원할 일이지 선물세트만 팔아서는 이 산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번에 김영란법의 명절 선물 가액이 30만원으로 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곡식과 채소 농사를 짓는 다수의 소농 농가들은 시큰둥하다. 쌀이나 마늘이 30만원어치 선물세트와 무에 상관이냐며 혹독한 불경기와 이상기후 문제가 더 시급하다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추석부터 명절 기간에 한해 30만원까지의 농수축산물 선물이 가능하다는 개정안이 나오자 축산 관련 단체는 즉각 환영 성명서를 발표했다. 슬슬 기준을 풀어주다 사문화되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모바일상품권이나 관람권도 선물 품목으로 허용됐다는 점을 봐야 한다. 권익위는 자연재해와 불경기 때문에 겪는 농업계와 문화체육계의 어려움과 내수시장의 활성화를 명분으로 관련 업계의 읍소를 받아들이는 태세를 갖췄다. 그래도 결국 대기업 중심 유통업계의 숙원인 상품권과 공연관람권을 선물 가능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 이번 개정안의 요체다. 혹자는 그깟 5만원짜리 관람표로 청탁이 되겠느냐 묻는다. 하나 한국시리즈 야구경기 결승전 관람권이라면 이는 선물일까, 뇌물일까.
청탁금지법이 시행될 때부터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미풍양속에 국가가 과하게 개입한다거나, 공직자도 아닌데 사립학교 교원이나 언론인들까지 청탁금지법 대상으로 포함된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반발도 심했다. 뭣보다 농수축산업과 외식업이 위축되어 농민들과 외식자영업자들이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는 우악스러운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해마다 권익위가 실행한 청탁금지법에 대한 국민 인식도 조사에서는 법안 찬성률이 80% 이상 압도적으로 높다. 선물을 받는 입장인 공무원의 찬성 비율은 그보다 더 높다. 안 주고 안 받으니 마음 편하다는 이유를 꼽았다. 접대 관행에 익숙할 법한 50대의 공직자들도 찬성 비율이 그 어느 세대보다 높았다.
초창기 청탁금지법이 실시되자 농업계는 크게 동요하면서도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분위기가 잠시 일었다. 명절 시장에만 매달리지 말고 일상 소비에 적합한 상품을 개발하고, 1인가구에 맞춤한 소포장 제품이 필요하다는 진단이었다. 법 시행 초기 가액에 맞춰 불고기와 국거리 한우를 실속있게 구성한 ‘영란세트’가 출시되어 인기를 끌자, 향후 구이용 등심 위주의 한우 소비 패턴이 다양화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모았다. 그뿐만 아니라 공공급식 현장에 우수 농수축산물을 공급하고 어린이들에게 과일 간식을 제공해 먹거리 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의견도 호응을 얻었다. 여기에 보태 해외 시장을 적극 개척해보자는 자못 진취적인 이야기도 쏟아져 나왔었다. 진부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자는 뜻을 세우기도 했었으나, 위기는 위기로 갈음됐다.
결정적으로 기후위기 문제는 어쩔 것인가. 가을이 사라진 듯 악착같이 덥고 습하다. 전체 물량의 40% 내외가 명절에 몰려 있는 배는 추석에 맞춰 무리하게 출하하면서 ‘귀신만 먹는 과일’이라는 오명까지 쓰고 있다. 고급 과일의 대명사였던 샤인머스켓도 추석 시장에 내느라 당도가 오르지도 않은 채 급하게 출하해 돈값 못하는 과일로 취급받기도 한다. 생산자 조직들이 조기출하 자제를 호소하지만 추석 하루 보고 달려가는 과수농업에 먹히지 않는다. 내가 안 하면 남이 내다 팔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기에 믿었던 사과마저 속을 썩이는 중이다. 추석 사과인 홍로는 봄에는 냉해로 꽃이 얼고 여름에는 지루한 장마로 탄저병까지 덮쳐 생산량이 30% 이상 줄었다. 반복되는 가을 이상기후에 아예 홍로를 아오리처럼 파란 여름사과로 유통시킨 농가가 생길 정도다.
명절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이제 명절이란 꼭 지켜야 하는 시절풍속이 아니라 ‘긴 휴가’에 더 가깝다. 올해는 여름 휴가철 때보다 추석 해외여행객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명절에 식당을 닫자 편의점에 삼각김밥이 동이 나더라는 일화들을 시장이 놓칠 리 없다. 결국 대목장은 편의점이다. ‘혼추족(혼자 추석을 보내는 이들)’을 겨냥한 도시락 제품과 여행용 편의식을 마련하고 홍보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게다가 국민의 절반 정도가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고, 지내더라도 간소하게 지내는 추세에 맞춰 데우기만 하면 되는 차례용 밀키트도 잘 팔린다. 다만 가공 편의식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국내 농업과의 연결고리가 매우 약하다는 것이 한국농업의 맹점이다. 식품업계가 날개를 달아도 농업은 날개 없이 추락하는 이유다.
이제 농업도 끝물이고 명절도 끝물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명절 선물세트라도 밀어내야 하는 농수축산업계의 속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국민과 함께하는 ‘국민농업’을 외치면서도 국민들이 비아냥댈 수밖에 없는 방향타를 잡았다. 하지만 미래는 어둡고 당장이 급한 농업계의 곤곤함을 야멸차게 나무랄 자 누구인가. 시대에 맞게 변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된 관행을 바꾸기엔 농업 전체가 무기력하다. 그저 달력에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날이라도 일단 팔고 봐야 살아남는다. 그것이 선물이 되든 뇌물이 되든 알게 뭐람.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이번 추석만 넘기자 할 뿐이다.
정은정 / 농촌사회학 연구자
2023.9.2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