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자그레브 탈성장 대회 참가기
지난 8월 29일부터 9월 2일,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린 제9차 국제탈성장대회에 다녀왔다. 내가 맡은 발표나 역할이 있는 행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공부하기 위해, 비행 수치(flight shame)를 굳이 무릅쓰고 다녀온 일정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자그레브에서 만난 『미래는 탈성장』(나름북스 2023)의 공저자 마티아스 슈멜처에게 한국 방문 의사를 물었더니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방침 때문에 어렵겠다는 답을 들었다.
어쨌든 큰맘 먹고 참여한 행사이니 잘 듣고 많이 배워가야 하겠다 싶었다. 사실 이곳에 모일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면면과 이야기가 나에게 그리 새롭지는 않은 것이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제 탈성장 그룹들의 논의를 따라가며 한국에 간간이 소개하기도 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탈성장과대안연구소’가 번역해서 온라인으로 공개한 비엔나 탈성장 그룹의 문헌 『탈성장과 전략』과 정식 출간한 『미래는 탈성장』도 그중 일부다. 이 문헌들을 번역하면서 최근 몇년 사이 국제 탈성장 그룹의 중요한 논의들이 이 연례 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과연 어떤 사람들이 어떤 분위기에서 이런 연구와 토론을 벌이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터였다.
탈성장 국제 컨퍼런스의 역사와 위상
국제탈성장대회는 2008년 빠리에서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평등을 주제로 첫 행사를 가졌다. 이때부터 ‘탈성장’(degrowth)이라는 용어가 영어로 소개되었고 이 개념과 관련 논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이후 국제탈성장대회는 탈성장 연구자와 활동가들 사이에서 토론의 핵심 공간으로 사용되며 바르셀로나, 베니스, 몬트리올,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말뫼, 멕시코시티, 비엔나, 맨체스터, 헤이그에서 개최되었다.
행사의 규모도 점점 커져서 2014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3차 대회에는 3천명이 참가했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온라인으로 개최된 7차 대회에는 4천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게 정확한 참가자 숫자를 집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 자그레브 대회도 공식 등록 참가자만 6백명에 이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최근 몇년 사이에 이 행사를 통해 소장 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탈성장 아이디어를 현실 정치 전략과 연결하는 논의가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 이번 행사는 “지구, 사람, 돌봄, 결국 그것이 탈성장이다”(Planet, People, Care: It Spells Degrowth!)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불평등의 증가와 같은 당면의 조건을 반영하는 주제였다.
나로서는 탈성장 연구자들의 관심사와 접근방식을 직접 확인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 역시 예상한 바대로, 탈성장을 구체적인 정치와 운동 프로그램으로 다루는 시도들이 두드러졌다. 이는 지난 5월 중순 사흘간 유럽 의회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번영의 향한 경로를 묻는 ‘성장을 넘어서’(Beyond Growth) 대회가 열린 몇달 뒤라서 이 대회가 그와 일종의 연장선에 배치되는 분위기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탈성장 꼬뮤니즘부터 어슐라 르 귄까지
대회는 맑스의 『자본』과 탈성장을 연결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사이또오 코오헤이의 개막 강연을 시작으로 꼬박 닷새간 빼곡한 발표와 토론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학술논문 발표, 정치 프로그램 평가와 토론뿐 아니라 등 문화예술 워크샵 같은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세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좌파 정치 조직의 활동가들은 탈성장과 맑스주의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했고, 탈성장 기획에 남반구의 목소리가 전면적으로 담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렸다. 탈성장 프로그램의 잠재적 자원들에 해당하는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대안적 금융, 돌봄 공동체의 현실 사례들을 소개하고 평가하는 세션이 줄을 이었다. 유럽 의회와 지방자치체에서의 경험, 크로아티아의 가까운 현대사 중 일부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의 계획경제 경험을 탈성장 정치 기획과 연결하는 논의도 흥미로웠다.
이 대회를 포함하여 국제 탈성장 그룹의 논의가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이라는 지적은 대회를 주도하는 그룹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프리카 등 남반구의 연사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제3세계의 역사와 경험에서 탈성장이 배우고 해결해야 할 것을 다루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럽과 남반구의 현실 조건과 경험이 탈성장 담론을 매우 풍부하고 튼튼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하나, 탈성장 그룹들이 강조하는 “대안들의 모자이크 접근”이라는 표현처럼 이 대회는 무척이나 다양한 시각과 접근 방식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연에 제한 없이 씨줄과 날줄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실증하고 있었다.
행사 마지막 날 야외 공원에서 열린 한 워크샵은 미국의 SF 작가 어슐라 르 귄의 소설들에서 변혁의 판타지를 열어젖히는 상상력을 간접체험하도록 했다. 탈성장의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대항 헤게모니를 모색하는 시도였다. 따듯한 초가을 햇빛 아래에서 그야말로 거의 모든 차원에서 모든 방식으로 탈성장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유럽 중심성과 한국의 과제
이 행사의 유럽 중심성 문제를 언급했지만,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한국인은 나와 돌봄 연구자 한명뿐이었다. 그리고 일본과 대만, 베트남 등 몇명의 아시아인이 눈에 띄었지만 이들의 논의도 특히 동아시아의 특수한 발전주의와 성장주의를 전면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아쉬운 공백이지만, 그러나 압축 발전과 성장 중독이라는 한국의 현상을 국제 탈성장 공동체와 면밀히 해석하고 토론하게 된다면 우리 역시 한국의 문제를 풀면서 국제적 논의에도 적잖은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과제로 남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제10차 국제탈성장대회는 내년 6월 스페인의 뽄떼베드라에서 열릴 예정이다.
김현우 / 탈성장과대안연구소 소장
2023.10.1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