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세계 시민의 역할은
수십년 동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은 ‘중동분쟁’ 따위의 모호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 자체에 프레임이 녹아 있다. 어느정도는 ‘대등한’ 세력들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슈를 가지고 다투고 있다는 듯이, 그로 인한 난민이나 사망자 수도 전쟁이라 하기엔 아무래도 적다는 듯이 인식을 호도하는 표현이니 말이다.
용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였던 듯싶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침공한 2006년, 가자지구를 침공하고 국제법상 금지된 백린탄까지 쏘았던 2009년을 지나면서 더이상 세계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전쟁’이 아닌 다른 말로 포장할 수 없게 됐다. 2023년 10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무장조직 하마스가 저지른 공격으로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세계 언론들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 부른다. 여기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팔레스타인 전체를 민간인 살상의 주범과 동일시하며 집단적 징벌을 가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둘째는 첫째 의미의 동전의 양면이다. 팔레스타인과 하마스를 분리함으로써 하마스를 테러 집단, 전범 집단으로 명시한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렵다. 복잡한 사안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알려진 문제여서다. 이유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의 민간인 1400명을 숨지게 한 하마스의 공격은 전쟁범죄다. 그러나 정당성, 도덕성과 실존이 걸린 이 문제에서 ‘이유를 막론’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마스의 공격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팔레스타인 연대위원회PCS 성명) 이유가 있고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감히 그 사실을 입 밖에 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지금 유엔 사무총장에게 사퇴를 요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려면 지도를 봐야 한다. 팔레스타인 땅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로 갈라져 있다는 것, 이스라엘이 툭하면 두 지역의 왕래조차 막으면서 봉쇄를 무기로 써왔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정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촌, 하늘만 뚫린 거대한 감옥 가자지구. 난민 약 100만명이 등록돼 난민촌 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스라엘 건국 이듬해인 1949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은 난민 2세대 3세대들로 채워졌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을 살아보지 못한 ‘난민촌 세대’들이 1980년대 후반 돌멩이를 들기 시작했다. 그 봉기(인티파다)를 계기로 생겨난 것이 하마스다.
그들이 고립된 채 무력투쟁에 매몰되게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굳이 분류하자면 하마스는 종교적 극단조직이 아닌 무장 정치조직이고, 한때는 정당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했었다. 그런데 2006년 그들이 자치의회 선거에서 승리하자 미국과 이스라엘은 봉쇄와 제재를 가해 무너뜨렸다. 자치정부의 주축이었던 파타(팔레스타인 최대 정당 중 하나)도 거들었다. 그때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주적 선택을 인정해줬더라면 어땠을까. 모든 비극에는 ‘놓쳐버린 기회’들이 있다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서는 기를 쓰고 공생의 기회들을 차단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몰아온 이스라엘을 새삼 탓하기도 허무하다. 가자지구뿐 아니라 요르단강 서안까지 공격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테러집단이라는 논리조차 스스로 허물고 있다.
1948년 건국 이래 이스라엘의 행태는 애당초 논리로 따져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안 점령, 동예루살렘 불법점령, 불법 정착촌 건설, 골란고원 불법점령, 불법적인 검문과 체포와 구금과 고문, 유엔도 반대한 분리장벽, 그리고 핵 보유. 2차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체제와 국제법의 모든 이상을 왜곡시키고 도덕적 정당성을 흠집 낸 것은 이스라엘의 행태와 그걸 지탱해준 미국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국제체제를 흔드는 범죄적 존재였다.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75년이나 안 풀린 것을 어떻게 풀겠나.” “미국이 뒤에 있는데 이스라엘을 어떻게 막아.” “아랍국들도 단결을 안 하는데 누가 팔레스타인을 돕겠어.” “팔레스타인 지도부도 분열되고 썩었다던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은 이런 인식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이 분쟁의 절대적 책임은 이스라엘을 무법자로 만들어준 미국에 있다. 국제적 해법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세계의 압박으로 푸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너무 미약한 희망처럼 여겨진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백인들의 식민지였고 백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나라에서 흑인들은 싸웠다. 로벤섬(20세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범 수용소)의 감옥에 갇힌 넬슨 만델라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헬렌 수즈먼 같은 백인 정치인이 있었다. 흑인들의 투쟁을 알게 된 세계의 시민들이 지지를 보냈다.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등 호응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생겨났다. 보이콧에 부딪힌 남아공 기업들이 정부 방침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영연방은 상징적 징벌로 남아공을 퇴출시켰다. 결국 미국도 등을 돌렸고 백인정권은 무너졌다. 하마스는 테러집단이니 만델라와 다르다고? 만델라도 조직 내 무장분파를 뒀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물론 가자지구가 로벤섬이 되기는 쉽지 않다.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는 붕괴 지경이다. 이스라엘의 범죄들을 고발해온 내부 양심들은 힘을 잃었고 평화의 목소리는 실종됐다. 이스라엘은 2018년 ‘유대국가’를 표방함으로써 인종주의 국가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한때 이스라엘 상품 보이콧운동(BDS)이 일어났던 유럽은 지금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놓고서도 갈등한다. 미국은 즉각적 휴전을 촉구하는 유엔 결의마저 거부했다. 중동 평화의 로드맵인 1993년의 오슬로협정은 비록 불만거리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더라도 일단 서로의 존재는 인정하고 보자는 양보와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스라엘 정치지도자에게 이츠하크 라빈 같은 평화 인식이 있다면. 미국 대통령에게 빌 클린턴만큼의 중재 의지만이라도 있다면. 팔레스타인에 야세르 아라파트 만큼의 권위라도 가진 지도자가 있다면.
지금은 셋 다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취약한 네타냐후 정권은 이참에 기세를 올리고 있고,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 복귀를 노린다. 리더십과 협상력을 불러내는 것은 결국 여론, 시민들이다. 좀더 빌드업을 해보자. 내년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확전을 못하도록 이스라엘에 물밑 압박을 가한다면. 이집트와 걸프 국가들이 중동 민심의 눈치를 보며 가자에 인도적 지원을 해준다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의 수교 협상을 지렛대로 활용한다면. 하마스를 후원해온 이란이 국내적 억압과 국제적 고립을 벗어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면. 중동에서 존재감을 키워온 중국이 이스라엘과 미국에 최소한의 압박 요인이라도 되어준다면. 하나하나의 고리들이 모두 취약한 것이 사실이지만, 75년 분쟁을 해결할 수는 없어도 사람들이 덜 죽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구정은 / 국제 문제 전문 칼럼니스트
2023.10.3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