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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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영화 「서울의 봄」을 곱씹어보는 일



유희석

경각심을 가져야 해


141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상영관을 나서며 처가 대뜸 말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해.” 나는 “그렇지”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잠시 멈춰 서서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그런데 어떤 경각심이지?”


자부심과 신뢰의 근거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12월 12일 밤, 그 9시간의 동선을 긴박하게 추적한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2023)이 던지는 경각심은 더없이 자명하다. 5·18의 참극으로 직결된 그와 같은 쿠데타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는 일, 그것이다. 겨울밤의 역심(逆心)은 오래 품었으되 실행은 전격적으로 이뤄졌고 영화는 반란군의 전격성을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경종을 울렸다.


한국의 현대사가 증언하는 것은 성공한 쿠데타도 반드시 응징된다는 역사의 준엄한 교훈이다.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1995년 11월 김영삼 문민정부는 반란의 두 주범을 감옥에 보냈다. 물론 지금도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만들어온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근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기억에 있을 리 없는 그 ‘역사’를 보면서 젊은이들은 ‘심박수 챌린지’(영화를 보며 얼마만큼 분노했는지 심박수를 기록하고 인증하는 유행)에 참여하고 있다. 이어지는 ‘현충원 챌린지’(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에 맞서 싸운 군인들의 묘소를 찾아 추모하는 움직임)는 미래세대가 앞으로 만들어갈 역사에도 신뢰를 품게 한다.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그렇게 밀어내고 있다. 그런데 2023년 12월 12일 지금, 영화가 울린 경종이 명징하고 우리의 현대사와 젊은이들에 대한 자부심, 믿음이 확고하건만 대체 어떤 경각심이지라고 되묻게 되는 것은 왜 그러한가? 이 영화를 곱씹어보는 이유다.


1979년 12월 12일을 다시 기억하는 일 


「서울의 봄」은 훗날 신군부라고 불린 반란군과 그에 맞선 군인들의 12월 12일 저녁 전황(戰況)을 선명하게 재현한다. 영화적 각색이나 과장이 더러 있지만 그날의 진상은 관객들의 뇌리에 확고하게 각인된다. 흥행 독주라는 소식 속에 ‘승자와 패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글과 영상이 앞다투어 쏟아져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심박수 챌린지의 흥분 가운데 승자의 뻔뻔한 영화(榮華)와 패자 및 그 가족의 비극적 삶이 조명되고 반란군에 맞선 그들의 영웅적 면모가 부각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12월 12일 반역의 ‘승자들’을 국립현충원에 고이 모셔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점에서도 44년 전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응징과 심판의 서사만은 아닐 듯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소박하고 단순한 진실을 찾아야 한다. 무도한 군부 일당에 맞서 비참하게 패하고 가족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당시의 군인들은 걸출한 영웅도 아니고 비장한 지사도 아니었다. 행주대교에서 반란군의 탱크를 홀로 막아선 이태신 수경사령관은 영화적 허구다. 반란군에 항거한 이들은 각자 자기의 본분을 생각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무엇이 그대로이고 무엇이 바뀌었나


여기서 더 곱씹어봐야 하는 것은 12월 12일 그날, 그러한 본분과 자리의 지킴은 일종의 결단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창한 대의나 구국을 위한 투신 같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나 자신과 가족을 소중하게 보듬으면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불의를 참지 않는 행동에 가까웠다. 특출 나지 않아도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들 산다. 그런 사람들이 당하는 수난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1979년 12월 12일의 반란은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에서 기원한 사건이다. 어떤 면에서는 5·16보다 훨씬 전에 발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이리저리 눈치 보면서 본분을 망각하고 자리를 이탈하는 ‘반란’이 오늘도 크고 작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봄」을 곱씹어보는 일이 무서운 것은 다른 게 아니다. 12·12 군사반란의 본질이 ‘본분’의 망각에 있다면 그것은 그날만의 사건이 아닌 셈이고, 따라서 경각심의 해제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때의 군부독재가 지금은 검찰독재로 변했다는 항간의 말을 야권 정치가들이 되풀이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돌부처처럼 돌아앉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것은 왜인가. 지금이 검찰독재 시대라면 그런 시대는 저절로 온 게 아니다. 그러니 시대의 진실은 더 쓰고 엄혹할 수밖에 없다.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인사들이 이제는 기득권이 되어 자신의 본분과 자리 지킴을 망각하는 행태를 우리는 지난 정권에서도 무수히 목격했다. 흔해 빠진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성찰은커녕 여전히 입에 발린 말로 정의를 논하고 남 탓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널려 있다. 87년체제의 좀비들. 국회에서 매일같이 들려오는 입바른 소리들이 왜 시민들의 뼈를 때리지 못하는가도 「서울의 봄」을 보면서 자문해봐야 한다.


패배한 승리와 「서울의 봄」 


그런가 하면 「서울의 봄」은 시중(時中), 즉 오늘 우리가 마주한 정치현실의 어떤 정곡을 찌르는 면이 있다. 천만을 내다보는 흥행도 목하 윤석열정부의 거대한 시대착오와 지난 두 보수정권은 저리 가라 할 국정난맥과 무관치 않은 현상일 듯하다. 그러나 「서울의 봄」을 가지고 정치권 일각에서 주고받는 ‘영화정치’에는 귀를 닫고 싶다. 12·12 군사반란의 실상을 열띠게 복기하고 그 패배의 원인과 의미를 2023년 12월의 맥락에서 되새겨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반가울 뿐이다.

 

결말을 훤히 아는데도 사람들은 「서울의 봄」을 계속 보고 있다. 현 시국의 어떤 일면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의 분노/응징 유발 서스펜스가 팽팽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체의 전개는 반란군의 승리로 귀결된다. 삶이라는 것이 원래 천태만상이라 ‘전두광’의 지도력과 돌파력을 높이 사는 관객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재현한 승리는 곱씹어볼 건더기가 없다. 앞으로도 기억되고 기려질 것은 승리의 이면이다. 그토록 참혹한 댓가를 치렀지만 패자들은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이름으로 남았다. 패배했지만 욕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패배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하리라. 다만 영화를 보면서 더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하는 과제는 남는다. 어찌해야만 욕되지 않는 패배까지 넘어설 수 있을까? 원칙있는 승리는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이 물음은 각자의 본분과 자리에 대한 담백한 성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서울의 봄」을 곱씹어보면서 어떤 경각심인가를 물었다. 민심을 등진 채 승리를 다짐하고 정당화하는 저마다의 언설들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어떻게 저버렸고 저버리고 있는가, 경각심은 그것을 잊지 않는 일이다.


유희석 / 전남대 교수, 영문학

2023.12.12.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