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통일문학의 발을 묶지 말라
도종환 / 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남북 문인들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함께 낸 문학지 《통일문학》 창간호에는 북의 소설가 장기성의 <우리 선생님>이 맨 앞에 실려 있다. 시골학교에 부임해 와서 5년간 근무하고도 교수강습소로 떠나는 남은희 선생이 방금 대학을 졸업하고 후임으로 온 윤금숙 선생에게 인수인계를 하며 학교를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버스가 두번째 굽이를 돌아설 때 아홉살짜리 사내애들 네댓이 버스를 세우라고 손을 흔든다. 그들은 "선생님"을 부르며 달려온다. 그대로 아이들을 뒤로하고 버스가 달리는 동안 개울건너마을 아이들이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건너 달려오고, 다시 앞굽이돌이에서 또 한 패의 아이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결국 버스는 멈추게 되고 아이들은 가지 말라고 남은희 선생의 옷자락에 매달린다.
이 소설의 후반부 아이들이 버스를 향해 달려오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윤선생은 "아, 친어머니와 헤어지는 아이들인들 저보다 더할 수 있으랴! (…) 저렇게 따르는 교원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대로 어린 가슴들을 공명시켜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불타는 충실성에로 부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국정원, 《통일문학》 반입을 불허하다
이번에 국가정보원에서 문제삼아 《통일문학》의 반입을 불허하게 만든 대목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선생님을 보낼 수 없어 울며 따라오는 것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수령님에 대한 불타는 충실성을 가르쳤기 때문일까? 남선생은 명환이가 누나에게 숙제의 일부를 대신 해달래서 가져온 것을 알면서도 그걸 폭로하고 지적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줄까 봐 망설이다가 덮어주는 교사였다. 장난 심한 인민반 3학년짜리 사내녀석들을 위해 바늘과 실, 단추를 함에 넣어두었다가 꿰매주는 세심하고 자상한 교사이다. 어깨폭이 유난히 넓은 학생을 위해 팔십리 먼 광산까지 가 평행봉을 특별히 만들어 그걸 머리에 이고 온 교사이다. 그랬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를 어머니 이상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런 남선생을 보면서 수령님을 떠올리는 건 윤선생이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임교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측에서는 이청준의 <눈길>을 앞에 실었다. 집안이 망해버린 뒤 남의 손에 넘어간 옛집에서 어린 아들에게 마지막 저녁을 해 먹이는 어머니, 날이 밝기도 전에 눈 덮인 길을 함께 걸어 산을 넘는 모자, 아들이 떠나버린 뒤 아들의 발자국을 밟으며 홀로 되돌아오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미 많은 남쪽 사람들이 가슴 뭉클하게 읽었던 대목이다.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보편성, 선생님과 어린 제자라는 사회성의 차이는 있을망정 두 작품 모두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두 작품을 읽으며 남과 북이 감동을 두고 경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북의 소설가 변창률의 <영근 이삭>은 농장마을을 배경으로 당돌한 여주인공 홍화숙이 주위의 질시와 비난을 이기고 몇배 더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분조장에 임명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은희경의 단편 <빈처>의 여주인공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평범한 주부이다. 그녀는 홍화숙처럼 확신에 찬 인물이 아니다. 나날의 일상사와 가사노동에 지쳐가는 전업주부이다. 그녀는 자신과 가정을 이끌어가는 일도 힘겨워한다. 그녀 앞에는 지친 일상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남쪽 소설가 김서령의 단편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더 비극적이다. 그들의 자의식은 상처로 깊게 멍들어 있고 세상은 냉혹하다. 그러나 상처뿐인 그들끼리 그래도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살아간다. 그들은 북의 여성작가 최련의 <바다를 푸르게 하라>에 나오는 해송이나 연경, <영근 이삭>의 홍화숙 같은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지구온난화나 바다자원의 합리적 이용 같은 국가적 문제를 두고 고민하지 않는다.
구시대적 인식을 탈피하지 못한 당국
그러나 모순투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남쪽 소설의 인물과 이상화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북쪽 소설의 인물 중 누가 더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지는 알 수 없다. 누가 더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리고 있는지, 누가 더 진실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지, 그 진정성의 문제는 독자들이 읽고 판단하게 해야 한다. 갈등과 대립 속에서 방황하는 인물과 갈등없이 견결하게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인물 중에 누가 더 설득력있는 인물인지를 읽는이들이 판단하기 전에 국정원이 된다 안된다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에서는 이번에 나온 《통일문학》의 창간사에 있는 "지금까지 북에서 발간되어온 《통일문학》을 6·15시대에 맞게 확대·발전시킨 북과 남, 해외 문인들의 공동잡지"라는 구절도 반입을 불허하는 이유라고 했다. 애당초 북에서는 이 잡지 표지에 '통권 제75호' 식으로 표기되기를 원했지만 남측에서는 명백하게 반대했다. 그 결과 남북 양측에서는 이 잡지가 6·15민족문학인협회 기관지 창간호임을 명시하되, 그간 북측에서 발행해온 《통일문학》이 있었음을 창간사에서 밝히자고 합의한 것이다. 어렵게 남북문인들이 합의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동안 북에서 만든 《통일문학》이 북측 체제를 문학적으로 지지·지원하거나 주어진 시기별 테제에 맞추어 북쪽 사회를 정서적으로 앞장서 이끌어가기 위한 문학을 실어왔다면, 이번에 《통일문학》이 창간됨으로써 그 내용의 절반이 남측의 원고로 채워지게 된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중요한 변화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북의 입장도 살펴보아야 한다. 북측도 많이 양보해서 이 잡지가 나온 것이다.
남북 문학교류는 문인들에게 맡겨야
극좌와 극우 모두 변하지 않으면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신영복 교수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사회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는 곳에 통일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통일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는 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난주에 뉴욕필이 평양에서 북한의 애국가를 연주한 뒤 남쪽으로 내려왔다. "화해의 서곡" "불신의 벽을 허무는 화음"이라고 언론은 평가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그들을 조사하거나 그들에게 입국금지조치를 내렸다면 전세계가 뭐라고 했을까? 남북협상을 위해 북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가슴에는 김일성 주석의 휘장이 달려 있다. 그걸 떼고 와야 입국을 허락한다고 주장하면 아무런 협상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남과 북이 공동으로 내는 잡지의 내용 중에 수령님이란 글자만 나오면 반입을 불허하겠다는 생각은 너무도 단순하고 구시대적인 논리이다. 앞뒤 문맥을 고려해서 읽어야 하고 남북관계의 변화와 화해라는 큰 틀에서 잡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북측의 작품을 읽고 남쪽의 문인들이 금방 어떻게 될 것처럼 우려한다면 그것 또한 문인들의 인식수준을 얕게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문인들에게 맡겨주면 좋겠다.
2008.3.4 ⓒ 도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