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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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코로나19 시기에도 압록강은 멈추지 않았다



강주원

변하지 않는 북한 위기설, 단절의 편견으로만 바라보는 압록강


2000년부터 내 나름 꾸준히 압록강을 찾았고 2019년엔 삶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일곱차례나 압록강에 갔지만 코로나19의 여파 때문에 최근 약 3년 동안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중국 단둥의 지인을 통해서 소식을 듣곤 했다. 덕분에 한국언론은 코로나19 이후 북한의 국경 봉쇄가 이어지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였으나 사실은 육로와 해상의 국경을 구분하지 않은 오보임을, 육로 국경의 인적 왕래는 중단되었으나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국제전화나 이메일을 통한 소통은 멈추지 않고 있음을 졸저 『휴전선엔 철조망이 없다』(눌민 2022)에 기록했고 이 책의 마무리에는 다음과 같이 남겼다.


“2006년 전후부터 붕괴론과 위기설을 통해서 북한을 바라보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한국 사회를 떠나지 않는다. 2020년부터는 봉쇄라는 말이 추가됐다. 이 단어들과 차이가 나지 않는 제재, 단절, 폐쇄도 있다. 이를 들여다보면 그 변화하지 않음의 세월은 약 16년이 아니고 더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2023년 5월 말, 개인 연구자보다 발 빠른 언론들은 압록강 상류지역인 북한 혜산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를 “고난의 행군, 기근, 가뭄, 홍수” 등의 단어와 함께 “북한, 비바람 앞에 서다”라는 제목 등으로 보도했다. 한마디로 익숙한 표현들이다. 코로나19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해설이 약 5년, 10년 전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볼 때마다 자꾸만 혼자 중얼거렸다. “북한의 코로나19 발생 여부도 파악하지 못했던 한국인데, 그보다 더 어려운 북한의 경제를 분석하다니!”


약 3년 만에 다시 만난 압록강의 삶과 풍경


2023년 8월부터 약 3개월 동안, 때로는 연구 목적으로 때로는 NGO 단체의 일원으로 만주벌판을 여섯차례 돌아다녔다. 그중 세번은 중국의 백두산 남파 지역이자 압록강 발원지 언저리에서 출발하여 하류(중국 집안~수풍댐 구간은 제외)까지, 약 800킬로미터의 압록강을 끼고 차로 이동했다. 이따금 강 한복판을 배로 가로지르기도 했다. 솔직히 나에게도 선입견은 있었다. 코로나19로 어렵지 않은 나라와 지역이 없다고 들어온 나로서는 압록강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최소한 압록강 너머의 북한 풍경,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약 3년 전에 멈추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두산 자락에서 봤던 압록강 최상류와 잠시 헤어졌다가 중국 장백에서 강을 다시 만나는 순간 이는 기우였음을 바로 깨달았다. 그곳에서 압록강 너머 바라본 북한 도시와 마을들은 달라져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꾸준히 기록해왔던 2017년부터 2019년 사이 새 건물이 지어지던 속도보다 코로나19 이후 지난 3년 동안 더욱 빠른 속도로 혜산을 하나둘 채워온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혜산에서 중강진 사이의 압록강 상류 너머도 마찬가지였다. 그곳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류지역인 만포 외곽도, 하류지역인 수풍댐 언저리의 삭주도 내가 약 20년 동안 바라보았던, 천천히 변해오던 북한의 마을과 도시가 아니었다. 최하류의 신의주는 말이 필요 없었다.


한국언론과 연구자들은 이를 오래된 관행과 편견이자 단절의 의미가 묻어나는 “선전마을”이라는 단어로만 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의 잠정적인 결론은 “코로나19 시기에도 압록강은 멈추지 않았다”이다. 한편 2023년의 압록강은 나에게 다소 엉뚱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단절의 강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한국사회와 내가 기록하고 있는, 멈추지 않고 흐르는 현재의 압록강 사이의 간격을 잠시 접어두고 1910년대 전후의 압록강이 궁금해졌다. 1909년 간도협약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으로 변모하던 때이다. 


1910년대 전후, 압록강과 두만강은 어떤 강이었을까?


이는 2023년 홍범도 장군과 관련된 논란을 지켜보면서 역사적 사실은 알고 있으나 그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무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부끄럽지만 영화 속 홍범도 장군이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온 장면만을 기억하지 봉오동전투가 실제로 6월에 벌어졌음을 몰랐다. 역사 속 인물들이 과연 몇살 때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 갔을까라는 호기심도 추가되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봤다.


『백범일지』를 읽다보면 1876년생인 김구는 19세였던 1895년 만주와 압록강 일대인 혜산, 삼수갑산, 집안, 환인, 통화 등을 다녔다. 약 15년의 세월이 흐른 1910년 전후 이 지역에 자신들의 인생을 맡기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는 알았을까! 1910년 전후, 1868년생인 홍범도는 약 40세의 나이에 오지의 대명사인 삼수갑산을 날아다니면서 압록강을 등지고 일본군과 마주쳤다. 1867년생인 이회영은 40대 초반인 1910년 12월, 추운 압록강을 따라 한달 넘게 이동하여 약 400킬로 너머의 신흥무관학교 터가 될 만주의 한복판 통화로 향했다. 1879년생인 안중근은 20대 후반인 1908년, 두만강을 넘어 지금의 북한 지역에서 전투를 경험했고 다시 만주벌판으로 넘어와 다음해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으로 향했다. 또다른 1879년생인 한용운은 30대 초반,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갔다. 그 이후에도 만주를 돌아다녔던 그는 1913년에 압록강을 넘어 귀국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기에 1926년 「님의 침묵」을 남겼을까!


1910년 전후에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만주엔 다양한 사연들이 녹아 있었다. 그렇다면 범위를 넓혀 191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 압록강 혹은 두만강은 어떤 강이었을까? 1912년생인 백석, 그를 추앙했던 윤동주는 1917년생이다. 백석은 바로 그 삼수, 압록강 언저리에서 1996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1942년 전후, 압록강 바로 옆에 있던 안동(단둥) 세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휴전선은 없다”라는 시어를 남긴 문익환과 1918년생 동갑 친구인 장준하의 유년 시절은 각각 두만강과 압록강에 녹아 있다. 윤동주의 유골함은 1945년 3월 두만강을 넘었고 중국 용정에 묻혔다.


2023년 여름과 가을, 나는 코로나19와는 상관없이 압록강은 멈추지 않았음을, 북녘 산하는 그 강과 함께 호흡함을 목격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폐쇄된 압록강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를 둔 북한 붕괴론과 위기설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인류학적으로 기록해야 할지 막막하다. 


1910년대 전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압록강 혹은 두만강을 넘나들었던 그들에게 묻게 된다. “당신들에게 압록강과 두만강은 단절의 색채가 강한 국경의 강이었나요?” 내 생각에 그들의 대답 가운데는 “두 강은 이쪽과 저쪽을, 그러니까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하는 그런 강”도 있을 것 같다. 하여튼 약 100년 전후에도, 코로나19 시기에도 압록강은 멈추지 않았다. 2024년의 압록강도 흐를 것이다. 


강주원 /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

2024.1.1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