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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세가지가 없어서 생긴 전세라는 인질극



최경호

“사회적 재난.” 최근 전세피해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인천 미추홀구, 서울 강서구 및 대전, 대구, 부산, 경기 등 지역별 또는 임대인이나 사고 유형(신탁사기)별로 생겨난 대책위들이 사건의 성격을 웅변한다. 이들은 2023년 4월 출범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로 모였고 슬프게도 회원은 늘어만 간다. 2019년 3,442억원이었던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보증사고 금액은 급격히 늘어 2022년 1조 1,726억원을 기록했고 이듬해엔 무려 4조 3,347억원에 이르렀다. 보험 가입자의 피해가 이 정도이니 전체 규모는 훨씬 더 클 것이다. 정부는 재난의 사회성에 대해 애써 선을 그으며 “개인의 사기 피해에 대한 공공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젠 국가경제마저 위태로워질 지경이다.


통계도 무섭지만 구체적 사연들은 가슴을 더욱 조여온다. 이사나 결혼 등 인생의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었고 집이 경매에 넘어가 쫓겨난 경우도 있다. 당장 쫓겨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임대인이 사라져 정비를 못한 승강기의 작동이 멈추고 단전·단수 경고장이 날아오거나 한겨울 건물에 누수가 생겨도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도 있다. 


신규 전세가격이 이전보다 낮아진 ‘역전세’ 상황에서는 후속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앞 사람의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게 된다. 집값이 전세가격 이하로 떨어지는 ‘깡통전세’가 되면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못 돌려준다. 이런 경우들은 애초부터 세입자를 기망할 의도로 가격을 부풀리고 바지임대인을 동원하는 ‘전세사기’와 구분하기도 하나, 세입자 입장에서의 고통은 매한가지다. 


깡통이든 사기든, 사태의 결과에 가깝고 더 심층적인 원인으로는 3무(無)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정치적 차원에서 보면 ‘국가’가 없었다. 렌트카 영업도 등록이 의무인데 삶의 터전인 주택은 불법으로 개조되거나 보증금을 떼일 우려가 농후해도 공인된 중개가 횡행했다. 주무부처마저도 관사 용도로 빌린 주택의 보증금을 떼이는 지경이지만, 주거감독관 제도나 임대등록 의무화 방안 등 ‘시장 정상화’ 조치의 도입은 요원하다. 


둘째, 경제적 측면에서 ‘주택금융’이 부재했다. 수출산업에 몰아주느라 건설 쪽에 투입할 자금이 없던 시대에는 주택공급자에게 돈을 대주는 금융의 역할을 선분양제도와 함께 전세가 대신했다. 하긴 전세제도는 논밭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고려시대의 전당(典當)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니, 애초 기원부터가 금융이고 ‘주거 사다리’ 역할은 한때의 착시효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임대인이 월세보다 전세를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월세로 전환했을 때의 수익률이 은행 이자율보다 높아도, 목돈으로 집을 한채라도 더 사두는 것이 월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투자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지극히 합리적인 경제행위이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전세는 세입자의 주거 사다리라기보다는 다주택자의 ‘레버리지 투자’용 도관체(導管體, conduit)다. 상승기엔 갭 투기의 수단, 하강기엔 깡통전세가 되는 것이 차마 자연스럽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주택 증가율이 높아질 때 전세도 같이 늘고 이후엔 줄어든 이유도 마찬가지다. 1995년 전체 주거형태 중 30%를 차지했던 전세의 비중은 2019년에 이미 반토막 났다. 전세 축소의 원인을 2020년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에서 찾는 논리가 엉뚱한 이유다. 정작 2020년 이후 통계를 보면 임대차보호법 덕분인지는 몰라도 전세가격이 매매가격보다 덜 올랐다.


마지막으로 법적으로는 ‘주거권’이 없었다. 채권보다 물권이 앞서는 것이 우리네 법치주의의 기틀인지라, 세입자의 권리를 위해서는 ‘대항력’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이를 위한 확정일자 제도마저도 효력 발생에 시차가 있어서, 근저당(물권)을 설정하여 보증금에 대한 권리(채권)를 무력화하는 악성 임대인들 때문에 배당순위가 밀린 세입자들은 쫓겨나기 일쑤였다. 이제는 채권이나 물권이 아니라 주거권이 최상의 가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면해서는 입주자와 공급자가 지분(물권)을 공유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주택의 지분을 공유하고 또 적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경기주택도시공사의 시도가 단순히 비싼 집값을 할부로 낼 수 있게 해주는 차원을 넘어 주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전세의 제일 큰 비극은 세입자들을 집값 상승 동맹(=레버리지 투자)에 강제 동참시킨다는 것이다. 보증금(=레버리지 투자금)을 무사히 돌려받기 위해서는 도리가 없다. 집값 상승이 멈추면 보증금을 날리는 세입자들이 속출하는 작금의 사태가 증거다.


공급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든 규제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든 금리인상 때문이든, 주택가격이 안정되면 그 기반이 허물어지는 것이 전세의 숙명이다. 따라서 주택가격이 안정되길 정말 바란다면 월세 시대에도 대비해야 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전세는 어떤 습속이나 문화로 자리 잡은 상황이다. 차분하고 질서있는 전환 전략이 필요하다. 


‘보증금 반환보증보험’ 제도는 근본 대책이 못 된다. 밑 빠진 독이 되어도 문제지만, 보증금이 낮아 보험이 필요 없는 우량한 집은 가입이 쉬운 반면 정작 보호가 필요한 이들은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보험 미가입 사유 중 비용이 부담돼서 가입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5.5%뿐이고, ‘가입하고 싶어도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54.4%였다는 경기도의 피해현황 조사결과를 눈여겨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험수수료 지원정책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보증금 수준을 낮출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경기도가 제안한 ‘보증금 감액용 대출 활성화’ 같은 것이 옳은 방향이다. 자가 소유도 좋지만 현재 집을 세입자가 무조건 떠안으라고 할 일은 아니다. 월세화로 인한 세입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앞으로는 대출보다 월세보조가 더 필요해질 것이다. 민간임대 부문에서는 등록 의무화로 ‘정보의 대칭성’을 구현하여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자. 영리조직에만 맡기면 경기변동에 따라 공급이 충분하지 않을 테니 공공·사회주택의 생태계도 키우자. 전세 인질극의 막을 내리는 길이다.


최경호 / 경기도 정책개발자문관

2024.2.13.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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