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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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중립’은 가짜다



강경석

서태지의 싱글앨범 「시대유감(時代遺憾)」이 올 초 리마스터 형식으로 재발매되었다. 새로 만든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와 함께였고 첫 발표 이후 29년 만이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사전심의제의 시대착오와 모순을 폭로하고 논란을 증폭시켜 결국 사라지게 만든 상징적인 곡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건(1995)을 보고 쓰기 시작했다는 이 노래의 가사 중 아마도 가장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은 대목은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일 것이다. 당시 사전심의를 담당했던 공연윤리위원회는 이 구절을 포함해 모두 세군데를 문제 삼았고 빗발치는 대중적 항의로 논란은 삽시간에 정치권에까지 번졌다. 결국 ‘음반및비디오물에관한법률’ 개정안은 1995년 11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렇게 한걸음 더 확장된 창작의 자유가 오늘날 K-팝 열풍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시대유감」은 그러한 역사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노래이기에 실제 이유가 어떻든 재등장 시점이 바로 지금인 것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함께 나온 새 뮤직비디오가 이 노래를 오늘날의 문맥에 연결시켜주는 듯하다. 여기서 무엇보다 도드라진 특징은 노랫말 텍스트를 그래픽으로 만들어 화면 가득 반복 영사한다는 점이다. 펑크록이라는 음악적 기조에 더해 시각적으로도 무언가를 외치는 듯한 구성인 셈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노래를 통해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을 향해 여전히 그리고 새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이자 노랫말의 메시지에 집중해달라는 주문은 아닐까. 과거 공연윤리위원회가 문제 삼았던 가사의 세 구절 중 나머지 둘은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라네”와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길, 오늘이야”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회적 대참사 앞에서 무책임하고 가식적인 사람들 때문에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되었지만 희망은 마치 이러한 비관과 절망을 먹이로 해서야 비로소 자라난다는 듯 여전히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 새로운 세상은 먼 미래의 약속이나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 가운데 있다는 뜻일 테다.


2024년의 ‘시대유감’을 불 지피는 모순들은 차고 넘친다. 10·29 이태원참사로 수많은 생령들이 비명에 떠났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위해 발의된 특별법은 혹한을 마다치 않은 유가족들의 밤샘기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아홉번째 거부권 행사에 가로막혔다.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망사건을 수사하던 박정훈 대령은 수사외압을 고발하다 도리어 항명죄로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전 대법원장과 고용승계를 목적으로 부당 합병과 분식회계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재벌총수에게는 무죄 판결이 주어졌다. 촛불대항쟁으로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이 국민 앞에 부끄러운 일 한 적 없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니는 시절이니 그 하수인들은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현직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속속 풀려난다.


예의 뮤직비디오의 서사적 배경은 모니터 화면처럼 생긴 얼굴의 군중이 수시로 등장하고 사방에서 거짓과 공포와 두려움을 주입하는 디지털 기기, 케이블 형상의 괴물들이 주인공을 향해 긴박(緊縛)해오는 일종의 악몽이다. 따라서 2024년의 「시대유감」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가식과 날조로 일그러진 주류 미디어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내외의 권력이 오로지 사익을 위해서만 남용되고 있다는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어서 일일이 따지는 것이 오히려 무력감을 자아낼 형편이지만 언론과 방송은 적당히 간을 맞춘 비판적 언설에 안주하며 이쪽도 문제고 저쪽도 문제라는 식의 공방론 프레임 뒤로 숨기 바쁘다. 과오와 책임의 크기가 전혀 다른 양자를 한 저울에 올려 평형을 맞추는 것도 중립이고 균형일까. 비판의 무게와 강도는 권력과 책임의 크기에 비례해야 공정한 게 아닐까. 수구언론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른바 팩트체크와 ‘중립’을 앞세우는 매체들의 문제는 더욱 고질이며 소위 진보언론들조차 이러한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백주에 야당대표가 살해 시도를 당해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야·좌우 공방론에 묻어버리기 일쑤인 그들의 중립은 이미 편향이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것이 촛불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정치, 경제, 사법, 언론을 구분할 것 없이 주류사회가 빠져 있는 공통된 착각이 있다. 그나마 좋게 말하면 자신들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끌거나 지도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착각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것을 자신들의 생각대로 조직하거나 조종할 수 있다는 망상일 것이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양대진영이 권력의 교대를 통해 유지되어오던 87년체제는 촛불혁명으로 이미 종식되었다. 전에 없던 일이 수시로 벌어지는 현재의 무질서는 모두가 그 후과라고 할 수 있거니와 관건은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길 바란다’고 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있다. 총선을 통한 정권심판이 최종 목표일 수는 없다. 그조차 새로운 헌정질서와 사회체제의 건설로 나아가는 과정의 하나일 때에야 비로소 의의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례없는 교착국면의 막힌 혈을 뚫고 다음 단계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이 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사임이든 임기단축이든 아니면 탄핵이든 어떤 절차도 그 자체로 헌정질서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위험은 현 정권이 길게 유지되면 될수록 증폭될 것이다. 여기서 각자위심(各自爲心)의 구경꾼이나 만들어낼 뿐인 ‘중립’이라면 그것은 이미 가짜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4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4.2.2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