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제주4‧3항쟁 종식 70주년, 항쟁의 정당성을 확인해야 할 때
1947년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3·1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제주4·3항쟁은 이듬해인 1948년 4월 3일의 봉기를 기점으로 무장투쟁에 돌입하면서 1954년까지 무려 6년간 지속된 사건이다. 올해로 그 사건은 종식 70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살의 주역인 국가 입장에서의 종식인 것이지, 피해자인 도민에게는 그후에도 계속 진행 중인 사건이었다. 역대 독재정권들이 도민의 집단기억 말살을 획책하면서 4·3의 진실과 진상을 집요하게 은폐하여왔던 것이다. 4·3의 진실과 진상에 접근하는 일은 철저한 금기여서 자칫 빨갱이로 몰려 큰 불행을 당할 위험이 상존했고,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도민의 입은 얼어붙어 있어야 했다.
그렇게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그제야 비로소 두려움을 떨치고 4·3의 진실을 요구하는 절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역대 독재정권들이 행사한 망각의 정치, 즉 은폐·부정(不定)·왜곡에 대한 투쟁이었고, 일반인들의 무관심과 냉소에 대한 투쟁이었다. 오래고 지난한 그 투쟁은 마침내 소중한 열매를 얻을 수 있었으니, 2000년의 4·3특별법(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2006년의 대통령 사과가 그것이다. 불가능을 꿈꾸었던 제주도민에게 그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4·3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항쟁의 역사적 정당성이 여전히 부정당하고 있으며, 공범자인 미국의 책임 문제에 대한 논의도 소극적이다. 4·3의 역사적 기억 일부만 용납된다. 대학살에 대한 기억의 담론화는 지금 어느정도 허용되고 있지만, 항쟁 패배자에 대한 기억은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한쪽은 모든 것을 갖추고 싸웠고, 다른 한쪽은 억제할 수 없는 분노만 지니고 있을 뿐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싸우다 죽었다. 남북분단 획책에 대한 분노와 극한의 탄압에 못 견뎌 일어났다가 쓰러진 젊은 패배자들의 죽음은 여전히 붉은색으로 칠해진 채 사갈시된다. 항쟁의 정당성이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년 동안에 도민의 집중적 노력의 성과로 4·3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그 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이해일까? 4·3의 진실을 깨닫고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해가 피상적이다. 그저 “4·3 때 사람들 많이 죽었다더라. 안됐어” 하는 정도의 관심이다. 하기는 남의 불행에 감정이입하여 깊이 공감 느끼기는 쉽지 않다. 진실이라도 불편한 진실이면 회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라, 4·3참사의 압도적 불행을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힘들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일상의 익숙함, 편안함과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꺼린다는 것을. 그래서 4·3에 대해 뭔가 좀 알아도 그 지식이 의식에 새겨지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가버려서 알고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대중의 무관심은 해묵은 반공·냉전사상과 결부되어 더욱 고질적이 되어버렸다. 70여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두뇌 속에서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그 유일사상이 4·3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역대 독재정권들을 겪었던 노년층에 두드러진다. 독재의 폭압정치가 그들의 정신을 불구로 만든 것인데, 심지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양심마저 파괴당하기도 했다. 물론 용기를 내어 그 고정관념을 깨고 나온 이들도 적지 않지만 정신적 불구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4·3의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정치적 이념 혹은 종교적 신념이 무너질까봐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4·3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혐오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상은 극우보수세력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된다. 극우보수세력은 4·3의 진실을 완강하게 부정한다. 그들은 4·3뿐만 아니라 5·18을 폄훼하고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혈안이다. 가짜 정보를 제작·유포하고 대중을 선동하면서 집요하게 역사 퇴행·왜곡 작업을 추진한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발언해야 할 지식인들의 대응이 미흡했다. 너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언동이어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평가할 가치도 대적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과 대적하기 싫다고 수수방관하는 동안 그들의 작업이 일반에 먹혀들어가고, 드디어 윤석열정권이 들어서면서 아주 노골화되었다. 스스로 파시스트 정권임을 선언한 꼴이다. 그들은 이승만의 영웅화를 위해 공식적으로 기념관이나 동상 건립을 계획하고 있는가 하면, 이승만 찬양 영화 「건국전쟁」(2024)을 제작하여 수많은 젊은 관객들을 동원, 의식화 작업에 광분하고 있다.
도대체 이승만이 누구인가. 대학살, 장기집권, 부정부패, 부정선거 등의 범죄를 저질러 4·19혁명에 의해 단죄된 자가 아닌가. 그 범죄들 중에 가장 큰 죄가 민간인 대학살이다. 4·3사건, 여순사건,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무고하게 학살당한 민간인 수가 수십만에 달하는데 그 최종 책임자가 바로 이승만이다. 사실이 그러한데도 ‘국부’이니 ‘건국의 아버지’이니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참으로 기가 찰 언동이다. 도대체 아버지라니, 제 자식들 수십만을 잡아먹은 자가 어찌 아버지일 수가 있을까! 인간의 이름으로, 대도살자 이승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된다.
일찍이 신채호가 말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4·3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4·3의 진실을 외면하면, 그 가해세력을 역사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 다시 그러한 큰 불행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역사의식의 부재가 내일의 업보, 앙화를 부른다. 그러므로 4·3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운명처럼 우리 자신의 역사인 것이다.
현기영 / 소설가
2024.4.2.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