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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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조건부 인생의 연대기

이하나

저출생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정부는 매번 그 정답을 비껴갔다. 지금의 정책은 조건에 맞는 이들에게만 혜택이 있다. 조건부 지원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저출생은 한국사회가 걸어온 고도성장, IMF 금융위기 이후에 강화된 각자도생, 공동체를 삭제해온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다. 한국의 역사는 멸종시대로 가는 연대기를 써왔다. 끊임없는 경쟁과 서열화가 정체성이 되어버린 지금의 청년이 있기까지 대한민국의 성장과정을 우화로 재구성해보았다. 


그 땅에는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땅 주인은 그들을 칭찬하며 더 많은 일을 주었다. 일거리가 늘어나자 일꾼들이 넘쳐났다. 땅에는 살 집이 부족해졌다. 아이가 많은 부부는 아이가 적다고 속이고 방 한칸을 빌려 살았다. 사람이 모여든 땅에는 모든 것이 풍족했지만 각자에겐 모든 것이 모자랐다. 


어느날 땅 주인은 성을 짓겠다 선포하고 일하겠다는 사람들을 줄 세워 일꾼을 뽑았다. 일꾼들은 열심히 성을 지었다. 성은 네모반듯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성을 지은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이 받은 돈으로는 성안 한줌의 땅도 사기 어려웠다. 다른 지주들도 성을 짓고 돈 있는 사람들에게 성안의 집을 팔았다.


숲속에 살던 새들은 성이 지어질 때마다 둥지를 잃었고 성벽 유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어갔지만, 새로 짓는 성들은 갈수록 화려해졌다. 성벽과 성벽을 잇는 길이 만들어졌고 그 길에 가격이 매겨졌다.


성 밖의 선량한 사람들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과 마차를 함부로 세워둔 사람들과 싸웠고, 약자를 공격하는 악당들을 피해 다녔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돈을 추렴하여 쓰레기를 치우고 성안의 안전을 지키는 사람을 고용했다. 맨 처음 지은 성에 살던 사람들은 두번째 지은 성으로 옮겨갔다. 두번째 지은 성에 살던 사람은 세번째 지은 성으로 옮겨갔다. 이들이 성을 옮겨갈 때마다 재산이 불어났다. 성 밖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식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입성만 하면 그다음은 탄탄대로일 것이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성 밖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골치 아파진 관리들은 성채를 늘리기로 했다.


우후죽순으로 성채가 세워졌다. 지주와 관리들은 성 밖에 살던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은행을 앞세웠다. “은행에 가서 돈을 빌려 성안으로 들어오세요!” 성 밖에 살던 사람들은 지어지지 않은 성의 그림만 보고 은행으로 몰려가 돈을 빌렸다. 은행은 돈을 빌려줄 사람들을 골라서 줄을 세웠다.


“성으로 들어가면 내 조건과 비슷한 이웃을 고를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다. “어차피 가난한 자들은 성에 들어올 수 없거든.” 


성안에 들어선 사람들은 서로를 탐색하고 비교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차를 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웃었다. 


더이상 비교할 게 없어진 사람들은 자식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고객님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고객님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위험한 일에 대비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됐다. 고객님들이 태어난 뒤에는 보육시설에 이름을 올렸다. 아이들은 건강해야 했고, 시간에 맞춰 보육시설에 갔다. 고객님의 부모들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아이가 되라며 100권짜리 책을 사고 멋들어진 유아차를 샀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악기 연주와 그림 그리기와 운동을 배웠다. 


학교에 간 아이들은 경쟁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00점을 맞은 아이가 10명이면, 99점을 맞은 아이는 11등이 되었다. 모두가 100점을 맞아도 1등이 될 수 없었다. 달리기 기록과 키와 몸무게도 경쟁하기 시작했다. 카페인을 마시며 잠을 줄이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은 모든 것에 점수와 순위를 매겼다. 어른들은 경쟁자들에게 말했다. “기본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나 경쟁자들은 유치원버스를 타고 가다가, 등교하다가, 캠핑하러 갔다가,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청년이 된 경쟁자들은 건물의 천장이 무너져서, 축제 구경을 갔다가 인파에 밀려서, 군대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젊은 여자들은 수시로 죽임을 당했고 인격을 빼앗기곤 했다.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할 때마다 관리들의 책임은 점점 줄어들었다. 관리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발뺌하기 바빴다. 경쟁자는 이제 생존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생존자들은 일꾼이 되고자 했으나 끊임없이 거절당했다. 여자라서, 남자라서, 어려서, 외국어를 못해서, 키가 작아서, 경력이 없어서, 건강이 나빠서, 예쁘지 않아서, 뚱뚱해서, 명랑하지 않아서, 말수가 적어서, 집이 멀어서, 생존자들은 일자리가 없었다. 큰 회사는 조건에 맞지 않는 생존자들을 거절했다. 사람들이 점점 오래 살게 되면서 싼 일꾼은 넘쳐났고, 기계들은 진화해 사람처럼 일했다.


생존자들은 서로의 순위를 매겼다. 머리카락의 윤기와 얼굴의 생기와 멋진 수염과 너그러움과 시원한 말투까지. 생존자들은 자기 사진에 찍힌 하트를 보며 안심하고, 줄 서기에 도전하며 성취감을 느꼈다. 너와 나는 성격이 달라서, 가진 돈이 달라서, 배운 게 달라서, 서로 조건을 맞춰보다 헤어졌다.


생존자들은 자기 부모들이 살아왔던 경로를 하나둘 포기했다. 일하는 걸 포기했고, 사랑하는 걸 포기했다. 친구를 만나지 않았고, 감정을 억눌렀다. 벼랑 끝에 걸터앉아 작은 화면으로 타인의 삶을 염탐하고 자기의 조건을 점검했다.


관리들은 생존자들을 벌판에 모아놓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여러분! 국가의 미래가 풍전등화입니다. 아이를 낳으세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돈을 주고 집도 주겠습니다.” 생존자들은 관리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자리를 떠났다. 관리들은 일어서는 생존자들을 붙들었다. 


생존자들의 피곤한 눈이 관리를 가만히 보았다. “조건에 맞아야겠네요.” 관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미안해요. 저는 조건이 안 돼서요. 저는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고요, 키도 작고요, 가정환경도 별로였어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뭘 얘기하시든 저는 그 조건에 맞지 않을 거예요. 아, 그보다는 아저씨가 얘기해보세요.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요.”


관리는 입을 다물었다. 생존자는 피식 웃었다. “아, 진짜 이 땅은 더럽게 빡세. 내가 조건이 안 되는데 어떻게 애를 낳으라는 거야.” 벌판을 떠나는 생존자는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했다.


이하나 /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2024.5.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