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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산불과 기후운동의 새 좌표



김현우

연초부터 거의 한달 동안 미국 LA를 휩쓴 기록적인 산불은 그 규모와 피해도 엄청났지만, 권좌로 복귀한 트럼프의 대응도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트럼프는 산불 피해가 커진 것을 개빈 뉴썸(Gavin Newsome)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책임으로 돌리며 자신이 만든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트루스 소셜(Truth Social)에 일련의 메시지를 올렸다. 트럼프는 뉴썸이 공공의 안전보다 환경정책을 우선시했다고 비판하면서, 특히 수백만 갤런의 물을 화재 지역으로 돌려야 했지만 환경보호종 민물고기를 보호하기 위해 이 조치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생물종을 언급한 것은 효과적인 비아냥거림이었겠지만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소화전의 물이 부족한 것은 먼 하천의 수자원과 무관했다. 더구나 캘리포니아주는 대통령선거에서 언제나 민주당 초강세 지역이었고 뉴썸 주지사는 유력한 야권 후보로 꼽히곤 했다. 그러니까 LA 산불은 트럼프에게 정치적으로 눈엣가시인 대상을 공격하기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리라.


캘리포니아의 대규모 산불은 비단 올해만의 일도 아니다. 겨울이 건조하고 따듯해지면서 몇년째 계속 큰불이 발생했고, LA의 경우 이번 산불 이후 9개월치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홍수를 겪었다. 2021년에는 텍사스에 기록적인 한파가 닥쳐서 전력공급이 마비되기도 했으며, 대서양 연안은 해마다 더욱 크고 많은 허리케인을 경험하고 있다. 말하자면 미국 전역이 기후격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화석연료와 지구온난화, 그리고 지역적 재난 사이의 연관관계는 너무도 분명해졌지만 트럼프는 지난 대선 유세에서도 “Drill, baby, drill”, 즉 석유와 가스를 얼마든지 파내자고 외쳤다. 그리고 취임과 함께 다시 한번 미국의 빠리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화석에너지와 핵에너지 개발에 중심을 두는 에너지정책에 보란 듯이 서명했다.


기후악당 비난만으로는 부족하다


트럼프는 왜 이럴까? 기후위기를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사기’(hoax)다. 기후변화가 중국과 좌파세력이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퍼뜨린 날조극이라는 의미에서다. 트럼프뿐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도 적잖이 이에 동조한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맞붙었던 지난 2020년 대선 시기 뉴욕타임즈가 실시한 설문조사는 지지 후보에 따라 기후변화 인식이 극과 극을 달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미국 국민의 58%가 기후변화로 인한 지역사회 위협을 우려한다고 답했는데, 바이든 지지자의 90%가 우려를 표시한 데 비해 트럼프 지지자 중 같은 대답을 한 비율은 23%에 그쳤다. 플로리다주 주민들은 해수면 상승과 허리케인 때문에 늘어난 홍수와 범람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지역의 응답을 보면, 민주당 지지층 82%, 무당층 58%가 기후변화를 우려한 반면 공화당 지지층은 26%만이 우려한다고 답했다. 트럼프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 복음주의 신자들 다수는 기후현상은 과학이 아니라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화석에너지 기업과 트럼프를 기후악당으로 비판해야 마땅하고, 기후과학자들의 데이터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현상을 경험하고 같은 정보를 접하더라도 사람마다 그리고 집단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행동한다는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의 ‘기후변화의 심리학’을 다시 곱씹어봐야 한다.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수용하고 반응하는 맥락과 조건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기후활동가와 시민들의 외침은 유효한 변화를 만들 수 없다.


기후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반응 유형을 나누어보면, 먼저 믿거나 믿지 않는 차원이 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시민의 절대 다수는 기후과학의 정보를 습득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기후과학의 결론 자체를 부인하거나(기후 부정론), 기후과학의 복잡하고 불확실한 부분을 주목하면서 결론의 수용이나 행동 선택은 유보하는(기후 회의론) 입장이 있다. 트럼프는 기후 부정론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기후 베헤모스”(조엘 웨인라이트·제프 만 『기후 리바이어던』, 앨피 2023 참조)다. 하지만 기후 부정론과 기후 회의론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서로 겹쳐 있으며, 개개인의 인식과 행보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정론과 회의론을 취하는 모든 이들과 집단은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 즉 허위의식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자기완결적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굶어 죽는 북극곰이나 기후난민의 비참한 사진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런 논리가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음으로, 기후과학을 인정하더라도 적극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두 유형이 있다. 그중 하나를 ‘어쩔 수 없다 1’로 지칭해보자. 기후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지만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재난 중 하나이며 나는 그 속에서 그럭저럭 살 만하다는 태도다. 또는 내가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환경단체를 소액 후원한다고 해서 섭씨 1.5도의 지구온난화 티핑 포인트를 막는 데에는 티끌만큼의 영향도 미칠 수 없으리라는 현실론일 수도 있다. 한편 ‘어쩔 수 없다 2’는 인간이 일으킨 기후변화는 지금의 사회체제나 사람들의 행동으로 막을 수 없는 수준이라는 체념론이다. 두 유형은 매우 다르지만 시민 다수의 인식과 태도에 가까우며, 어떤 적극적인 기후행동을 하지 않게 만든다는 동일한 효과를 낸다.


믿지 않은 것, 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것: 기후운동의 좌표를 재점검해야


하지만 기후위기에 대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입장도 분명히 있고, 우리의 희망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도 두 유형이 있다. ‘어쩔 수 있다 1’은 에너지 전환과 생태계 회복이라는 과학적 해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런 방향으로 정부들을 움직이면 우리가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 프로그램을 이행하고 그린뉴딜을 시행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한다. 기후운동과 녹색 정치세력 다수가 대체로 그런 생각을 갖는다. 그러나 이 입장은 지나치게 확신되거나 실패를 가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각국 정부와 기후운동들은 빠리협정 이후 10년간, 일정한 성과를 내기는 했어도 온난화를 늦추기는커녕 탄소중립의 경로로 올라서는 것조차 실패했다.


‘어쩔 수 있다 2’는 우리는 실패하고 있고 티핑 포인트를 넘어설 공산이 더욱 커졌지만 그럼에도 기후붕괴 수준을 완화하고 장기 비상사태를 견뎌낼 온갖 준비와 연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후위기라는 ‘지도 없는 세계’를 받아들이고 재지역화와 대안적 교육학을 준비하자는 젬 벤델(Jem Bendell)의 ‘심층적응’ 논의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입장은 ‘어쩔 수 없다 2’와도 어느정도 소통이 가능하다.


이념형적 유형 분류는 어느 것만이 옳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경우에 쓰인다. 여기서 거칠게 펼쳐본 유형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데에서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것’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어쩔 수 있다 1’이 과연 현실적인가 냉정하게 묻고, ‘어쩔 수 있다 2’를 수용하거나 병용할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 기후운동 역시 2050년 또는 그 이후까지 가는 경로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거칠게라도 점검하고, 어쩔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을 차분히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김현우 / 탈성장과 대안연구소 소장

2025.2.18.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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