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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잘사는 나라 한국의 빈곤 해결을 위한 세가지 제언



김윤영



“현실요? 제가 다 알려드릴 수 있어요. 솔직히 노숙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실려 나가는 사람들 있어요. 쪽방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아침마다 실려 가요. 죽는다고요.”


지난 7월 3일 국회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빈곤사회연대는 약 3년마다 기초생활수급 가구의 가계부를 조사하는데, 올해도 두달에 걸쳐 가계부 조사를 진행했다. 이들의 가계부에는 수급자가 되기도, 수급자로 살기도 어려운 하루하루가 담겨 있었다. 부족한 생계비, 갑작스러운 의료비, 가난에 따라붙은 고독과 외로움. 국회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보건복지부 과장은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최저생활보장’ ‘보충성’ ‘자립 지원’의 원칙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난으로 수급자가 되어봤지만 자립 지원을 받은 바 없고, 자립하지 못했으니 수급 기준에서 탈락하기를 반복했던 ‘사각지대’의 한 시민이 그에게 말했다. “아침마다 실려 가요. 죽는다고요.”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난에 빠진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소득 보장’을 목표로 2000년부터 시행되었다. 기존의 생활보호법에 있던 인구학적 기준을 폐지하고 전국민에게 신청권을 확대한 점이나 ‘보호’ 대신 ‘보장’이라는 단어를 통해 권리를 명시했다는 점은 진일보를 보여주는 희망의 단서였다. 그러나 이 목표가 제대로 실현된 적은 한번도 없다. 부양의무자 기준을 비롯해 까다로운 선정 기준은 언제나 많은 사각지대를 남겼고, 어렵게 수급자가 되어도 받을 수 있는 수급비는 잔여적인 수준에 불과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국민기초생활보장법 2조)을 보장하지 못했다.


사회보장제도의 목표와 실제 삶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이 간극은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접수대 너머 공무원들은 가난한 이들을 그저 민원인으로 취급하고, 복잡한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적혀 있지 않은 예외 규정을 적용하는 일에도 점점 더 인색해져간다. 토론회에서 언급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세가지 원칙과 거리에서 벌어지는 죽음 사이의 간극은 얼마만큼일까? 거기에는 예산의 한계나 목표와 상반된 운영방식으로 인한 차이만이 아니라 갈급함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66만명 사각지대 중 한명의 문제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당면한 삶이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비용


1950년대 100달러도 되지 않았던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이 3만달러를 넘어선 지 오래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외치지만 연 소득이 1억원이 넘는 가구는 22.6%이며, 지난해엔 2872만명이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한국의 빈곤율은 15%에 달한다. 노인빈곤율은 40%가 넘으며(「Pension at a glance 2023」, OECD)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발전한 사회에서 빈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빈곤문제를 잊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전파를 탈 때마다 많은 이들은 분노와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빈곤을 두려워하고, 빈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이는 한편 가난한 이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편견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동정과 불안, 공포, 혐오가 뒤섞인 마음이 지금 한국사회가 빈곤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래서 가난은 더 외로운 문제가 되고 있다. 극단적인 사건과 죽음이 아니면 문제로 취급되지 않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실패로 간주되며, 나에게 닥치지 않기만을 바라는 두려움에서 멈추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은 보통의 사건이다. 연 소득이 5천만원이 안 되는 가구는 44.2%로, 소득이 중단되면 이들 대부분은 빈곤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풍요로운 한국에서 빈곤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빈곤은 물질적 결핍을 넘은 사회 경험이고, 가능성과 역량의 박탈이다. 우리 사회가 만든 빈곤은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닮았고, 그 불평등의 비용을 가장 크게 치르는 이들은 단연 현재 빈곤에 빠진 이들이다. 빠르게 성장한 나라에서 정체를 경험한 사람들, 대다수 사람들의 식습관이나 소비나 휴가의 질이 수직상승할 때 새로운 종류의 빈곤과 박탈 또한 만들어진다는 것을 체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더불어 당장은 가난하지 않더라도 빈곤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 뿌리 역시 빈곤과 불평등의 비용으로 보아야 한다. 빈곤을 사회적으로 연결된 문제로 인식하는 것, 긴급한 해결이 필요한 과제로 우선순위를 조정하는 것. 빈곤문제 완화의 출발점에 놓여야 할 인식이다.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당면한 복지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빈곤과 불평등을 발생시키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경쟁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는 방법을 잃어버린 우리 모두의 경험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 세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지키지 않은 약속을 완수해야 한다. 부양의무자 기준 완전폐지와 같은 해묵은 과제를 더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 정치권은 때마다 제도 변화를 약속하지만 시행령과 시행규칙, 불투명한 거버넌스를 통해 이 목표를 최대한 억압하는 기술은 날로 발달하고 있다. 약속의 이행이 지체되는 사이 실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국가와 사회를 냉소하게 된다.


둘째, 사회 공공성의 강화다. 기후위기, 감염병과 같은 새로운 위기는 기존의 불평등을 타고 재난이 된다. 이에 맞설 가장 효과적인 주체는 단연 국가다. 경제적 이익으로 셈해지지 않는 시민의 보편적 행복 증진을 위해 나설 수 있으며, 대규모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제도 개선을 넘어 주택, 의료, 교육과 같은 삶의 전영역에서 공공성을 강화하고, 소득과 자산의 차이로 발생하는 불평등의 효과를 실질적으로 감축해야 한다.


셋째, 가족에게 전가된 기능을 사회로 옮겨와야 한다. 돌봄을 사회화하고, 기초적인 생활의 필요 대부분을 사회가 우선 보장하는 전환에 나서야 한다. 이는 가족 내 애정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가족에게도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가족이 없어도, 가족이 가난해도 돌봄과 존중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 다양한 가족에 대한 존중은 이를 위한 전제다.


서울역에서 만난 한 거리 홈리스가 “우리는 전시품”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서 도저히 이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도록 두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빈곤문제는 그저 방치하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권리를, 생명을 적극적으로 침해한다. 셈해진 적 없는 이들의 권리, 나아가 빈곤에 대한 두려움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삶에 응답할 때다.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빈곤의 두려움을 수선할 시간, 지금이 적기다.


김윤영 /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2025.7.8. ⓒ창비주간논평

커버 이미지: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