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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 표현의 자유라는 착각



홍성수


5월 18일에 ‘탱크데이’ 이벤트를 벌인 스타벅스 사태에 이어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응원 사건이 터졌다. 배재고 야구부는 광주제일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라며 5·18 혐오발언을 외쳤다. 혐오가 사회문제로 본격적으로 대두된 계기 중 하나가 2013년 일간베스트 게시판 사건이었다. 당시에도 5·18 혐오가 문제였다. 희생자의 관을 두고 조롱을 일삼은 게시물의 충격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때 누군가가 “독일이었다면 헤이트 스피치(혐오표현)로 처벌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때부터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혐오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여전하다. 언제부턴가 조금 기이한 입론이 하나 등장했는데, 바로 ‘표현의 자유’다. 혐오 밈을 유포하는 10대 청소년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느닷없이 표현의 자유를 꺼내 든다. 배재고 사태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며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표현의 자유가 지닌 본질과 한계


한국의 현대사에서 표현의 자유는 사회 진보를 갈망하는 이들이 주창하는 권리였다. 국가의 폭압에 맞서 자신의 소중한 양심과 사상을 표명할 자유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민중들이 외치던 자유였다. 하지만 이제 구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민주화운동의 유산과 가치를 중시하는 범진보는 혐오표현을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오늘날 극우로 분류되는 세력들은 5·18을 모욕하고 소수자를 차별하는 폭력적 말들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이분법에 집착할 이유가 없으니 그 구도가 깨진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먼저, 표현의 자유를 말했던 취지와 의의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유는 ①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인격을 형성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이며 ②‘사상의 자유시장’을 통해 결국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③다양한 견해가 표출되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논리로 혐오표현의 자유까지 옹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감정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행위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사상의 자유시장론’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론이 성립하려면 최소한 사상이 유통될 수 있는 공론장의 형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혐오표현은 소수자 집단을 공격하고 배제하여 공론장에서 아예 몰아내려는 속성을 갖는다. 경쟁의 무대 자체를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시장 파괴’ 행위다.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법의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오히려 공론장을 파괴하는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사상의 자유시장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법이다.


미국식 표현의 자유가 작동하는 원리


또 하나의 오해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 그 표현의 정당성까지 담보한다는 착각이다. 어떤 표현을 할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그 표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따라서 혐오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그 표현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더불어 표현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된다 하더라도, 국가권력이 아닌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의 규제나 정치적·사회적 비난과 제재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 이 부분과 관련해 특히 미국 사례에 대한 오해가 크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보장하는 나라이지만, 그렇다고 직장·학교·스포츠 현장에서 혐오표현을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혐오표현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적 괴롭힘으로 이어지거나 적대적 환경을 조성할 경우, 징계·시정조치·민사책임 등 강한 제재가 뒤따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미국에서는 공원 한복판에서 혐오표현을 외친 사람을 국가가 곧장 잡아가지는 않지만, 똑같은 말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반복되거나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환경을 만들 경우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배재고 사태처럼 스포츠 경기장에서 선수가 혐오표현을 했다면 리그나 협회 차원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고, 관중의 경우에도 퇴장이나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질 수 있다. 단지 형사처벌로 곧장 이어지지 않을 뿐, 공동체적 제재나 자율규제에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ABC 방송의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What Would You Do?)」라는 일종의 깜짝 카메라 프로그램이 있다. 길거리나 까페에서 인종·성소수자·종교 혐오 상황을 가상으로 연출하고 평범한 시민들의 반응을 살피는 프로그램이다. 서구 사회가 개인주의적이라 남의 일에 무관심할 것 같지만, 현장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이 나타나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당장 나가라”며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이 자주 연출된다. 혐오표현을 법으로 처벌하진 않을 뿐, 일상 속에서는 강력한 ‘사회적 규제’와 연대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이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처럼 사회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혐오를 통제할 수 있다는 신뢰가 깔려 있다.


진정으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면?


만약 일련의 사태를 두고 ‘형사처벌까지는 하지 말자’는 의미로 표현의 자유를 공론화하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므로 아무런 사회적 제재와 대응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미국식 표현의 자유도 아니다. “그런 응원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이라고 면피성 발언을 얹은 뒤,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아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건 사실상 5·18 혐오 조롱 행위를 묵인하고 옹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판의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표현의 자유에 맡기자’는 주장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최근 배재고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동문들이 광주일고를 직접 방문하여 사과했다. 성숙하고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스포츠를 비롯한 각 영역에서 더 촘촘한 ‘자율규제 장치’와 사전 예방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고 국가 개입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혐오표현에 대한 사회의 비판과 개입까지 주저해서는 안 된다. 학교, 스포츠단체, 직장, 시민사회가 혐오표현에 대해 더 적극적인 규범과 교육적 대응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국가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면, 사회적 책임의 무게는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2026.7.8.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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