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왜 지금 한국사상인가
강경석
한국에도 사상이 있느냐는 외국 학자의 질문을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는 국내 원로교수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자문화중심적 태도가 몸에 배어 나온 물음일 테니 답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모욕감을 떨치기 어렵다. 사상이 없는 나라도 있는가? 그러나 답을 내놓으려 한들 당장 어떤 담론이나 인물을 내세워 긴 설명을 대신할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며, 해외 전파를 논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 자신에게는 한국사상이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덮어놓고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닌 바에야 당연히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왜 지금 한국사상이 중요한가’에 대한 응답도 마련해야 한다.
알다시피 기술발전과 자본주의의 지구적 확산을 골자로 하는 근대 물질문명 자체가 서구에서 이식된 것이기에 근현대 한국의 문화와 현실은 늘 안팎의 혼종과 경합의 장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구사상을 아예 떼어놓고서는 한국의 사상을 말하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하지만 흔히 하는 오해처럼 한국사상은 ‘한국만의’ 사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현실이 직면했던 또는 직면하고 있는 절실한 과제상황에 상응해서 형성되고 체계화된 생각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러한 생각들을 형성하는 데에 영감을 준 발상이 애초에 어디서 왔는지는 오히려 나중 문제다. 혼종성은 우리가 문화나 사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어떤 근본적 속성을 개시하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과제상황이 무엇이길래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요청되었는지,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의 본질을 규명하고 극복하는 데 얼마나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의 고유함은 문제설정의 토착성에서 비롯한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지식담론들이 처해온 곤경과 마주하게 된다. 대학에서 전형으로 드러나듯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주류 담론들은 오랫동안 서구의 이론적 틀을 빌려와 우리 현실을 설명해온 관행에 익숙해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을 몸으로 경험하며 사유를 단련하기보다 서구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구축된 개념 장치를 수입해 우리 현실에 대입하는 절차에 길들여져왔다는 데 있다. 현실인식과 실천의 과제를 ‘아웃소싱’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는 우리 지식사회의 지적·사상적 퇴행이나 수입이론 의존 자체만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 공동체가 직면한 현실, 진정한 과제상황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나머지 우리가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바로 그 ‘주인의 자리’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위기의 진짜 본질이다.
정도전부터 김대중까지 30권으로 이뤄진 ‘창비 한국사상선’이 완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수년간 편찬 실무진의 일원으로 또 그중 두권의 편저자로 작업에 관여하면서 새삼 실감하게 된 것이 있다. 한국사상사를 가로지르는 핵심자질 가운데 하나가 강렬한 자주의식이라는 점이다. 이는 해방과 분단 이전 식민지시기에 더욱 뚜렷했다. 계급의 상하와 이념의 좌우를 막론한 과제상황의 공통된 절실함이 그 기초일 것이다. 국내외의 온갖 정치적·물질적 악조건 속에서도 당시의 주요 사상가, 운동가들은 언제나 식민지극복을 대전제로 한 중도적 통합에 부심했고 흔히 알려진 것처럼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어느 한쪽 이념에 극단으로 기울기보다 대개는 그것들을 상대화하는 데에 더 많은 힘을 썼다. 파벌 간 대립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그러한 개개의 흐름들을 더 높은 차원에서 상대화하는 상위인지적 사유와 감각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했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세계사적 감각과 안목이 당시의 문헌들에 넘치는 이유다. 이제는 혁명으로 불러야 할 3·1운동은 그 총화이자 식민지시기 전체를 관류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저류에 남아 흐르는 힘의 원천이었다.
사유는 대지와 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과제상황으로부터 물음을 세우는 훈련 즉, 사유의 토착성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훈련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신자유주의 이념에 의해 떠받쳐져 있던 국제질서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 탈냉전 이후 수십년간 당연시되어온 세계화의 문법―국경을 넘나드는 자본과 상품, 규칙에 기반한 협력―은 더이상 자명하지 않다. 여기에 인공지능을 위시한 기술혁명은 노동과 지식, 심지어 인간존재의 경계를 심문하며 우리의 사유와 인식체계 전반을 흔들어놓고 있다. 한반도가 겪은 식민지, 전쟁 그리고 분단체제가 세계사의 온갖 모순이 착종하는 과정이자 집적된 결과였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 한복판을 온몸으로 통과해온 우리 자신의 경험과 사유에서 세계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발굴될 여지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제 막 문명전환의 긴 이행기에 들어선 우리 손에 어떤 질문이 쥐어지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원대한 서원을 품는가에 달렸다. 시인 김수영의 발언 가운데 “시의 뉴 프런티어란 시가 필요 없는 곳”(「시의 뉴 프런티어」)이라는 역설이 있다. 원용이 허락된다면, 사상이 없는 나라는 오히려 유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알다시피 유토피아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땅이란 뜻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6년 가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6.8.2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