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잔혹한 상상력과 관습적 서사
백지연 | 문학평론가
요즘 영상문화에서는 ‘하드고어적 상상력’으로 지칭되는 잔혹한 이미지들의 세계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화면 가득히 피가 흘러넘치고 신체가 절단되고 폭력과 섹스가 거침없이 등장하는 잔혹한 이미지는 문학 쪽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소설에서 90년대 이후에 집중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잔혹한 이미지들은 성과 폭력을 소재로 다룬 그로테스크한 상상력들을 통해 제도예술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미학적인 충격효과를 주고자 했다. 가깝게는 장정일의 성과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적 탐사라든가 송경아의 소설에서 환상형식으로 포착된 엽기적인 이미지들, 백민석 소설에서 유희화되는 폭력과 성의 담론들을 좋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의 토양을 흡수한 잔혹한 이미지들의 출현은 전통적 서사형식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의 충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의미를 지닌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로운 작가들의 소설작품에서는 이러한 미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잔혹한 이미지 생산이 문명비판적인 사유를 바탕에 깔고 집중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한 극단적인 과잉의 이미지들은 어떤 지시대상의 압박도 없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이미지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도시의 황량한 이미지와 공간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강영숙과 편혜영에서부터 성과 폭력의 문제 속에 잔존하는 정치성을 탐구하는 백가흠의 소설, 안보윤과 김이설 등 신인작가들의 작품들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90년대 세대가 보여주었던 당대의 서사규범에 대한 강박의식에서도 벗어나 본격적인 이미지의 질주를 보여준다.
이들의 소설에서 이미지들의 성찬은 어느 순간 자신이 보여주려는 현실의 지시대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있다. 그것은 폭력과 잔혹극 자체가 철저하게 씨뮬레이션화되어 그것 자체로서 또다른 자족적 현실이 되어버린 소설의 한 특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계절에 발표된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이나 백가흠의 <웰컴, 베이비!>(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김이설의 <순애보>(현대문학 2006년 4월호)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 역시 황량한 현실을 상징하는 끔찍한 이미지들이 주는 미학적인 전율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는 음습하고 비현실적인 악몽의 이미지들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이야기의 형식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으로 주목을 요한다. 이미 전작 《아오이 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작가가 암시한 바 있듯이 현대 도시문명은 인간주체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디스토피아의 세계이다. 달아날 출구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공포스러운 세계이다.
“졸음이나 식욕, 성욕 따위도 시간을 지키며 찾아”오는 도시에 직장을 두고 있는 주인공은 중화학 공장단지가 있던 도시 근교의 전원주택 단지에 입성하게 된다. 소설에 스며들어 있는 불길한 분위기는 무허가로 투견을 기른다는 ‘사육장’에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로 현시된다. 개짖는 소리의 강렬한 청각적 이미지는 결국 주인공의 아이가 개들에게 물리는 끔찍한 장면으로 확대된다.
혼자 방치되었다가 개에게 물려 죽은 비극적인 소년의 실화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소설 속의 사건 자체가 주는 소재적인 충격은 크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낯설고 기괴하게 느끼는 것은 파산선고를 받은 가족들이 느끼는 정신적 불안과 초조가 느닷없이 개에게 물리는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이동하면서 벌어지는 서사의 비약 과정이다. 현실에서 이미 우리가 접하고 들었던 뉴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이 사건이 참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비약이 주는 미학적 효과 때문이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를 차에 태워 어둠속을 달리는 가족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이 작품이 보여주려 했던 것이 현실의 상세한 모습이 아니라 극화된 환상의 일부임을 뚜렷하게 알려준다. 소설이 현시하는 것은 빚에 쫓겨 도시로부터 이탈한 소시민들이 겪는 생활고가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문명세계의 비극성에 대한 직설적인 비유가 된다.
주인공들이 당면한 부조리한 삶의 풍경을 치밀한 이미지로 직조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수준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한 묘사력을 자랑하는 소설의 잔혹한 장면들은 도시/비도시, 일상/비일상, 진입/추방이라는 이분적 도식에 가로막히고 만다. 낯설게 하기의 효과로 등장한 잔혹한 이미지들은 ‘이 끔찍한 세계에서 우리는 결코 탈주할 수 없다’라는 엄숙한 주제 속에서 의미를 제한당한다. 요컨대 이 소설의 종반부까지 쉼없이 긴장감을 불어넣는 이미지들은 ‘우리를 압박하는 씨스템의 폭력구조’라는 직설적 비유로 쉽게 안착하면서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당대의 삶을 절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잔혹성의 미학은 젊은 작가들이 현실을 담아내는 효과적인 서사전략으로 각광받고 있다. 문제는 이 이미지들이 종종 안착하는 당위적인 주제의식과 낡은 서사들이다. 새로운 이미지들이 상투적인 서사를 쇄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새로움이 아니라 묘사의 기술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소설이 아무리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해도 우리는 이미 훨씬 더 엽기적이고 끔찍한 뉴스가 들려오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전위를 표방하는 과잉된 소설의 이미지들이 때때로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뒤늦은 기록들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06.05.30 ⓒ 백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