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촛불집회 최초 연행자의 이야기
안병욱 / 회사원
지난 주말에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와 거리행진이 있었고, 지금까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연행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 글은 이런 대규모 거리행진의 시발점이 되었던, 일주일 전 5월 25일(일) 새벽 5시에 교보문고와 광화문우체국 사이 거리에서 최초로 강제연행된 나의 경험담이다. 나는 5월 24일(토) 촛불집회에 갔다가 다음날 새벽 5시경에 서울의 한 경찰서로 아내와 함께 연행되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시위에 나가본 적 없던 내가 연행까지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느꼈던 점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작년 11월에 결혼한 새신랑이자, 올해 4월에 학교에서 막 벗어나 직장에 들어간 신입사원인 나는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가장이자 회사원인 나로서는 주로 토요일에 나가는 것이 내 분수에 맞는 사회참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5월 24일 저녁에도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왜냐하면 연일 계속된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문제 자체를 해결하기보다는 국민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설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정부는 연일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결국 고시를 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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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평화적으로 청계광장에서 모여 촛불을 들던 시민들은 대통령과 정부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청와대로의 행진이었고 그것이 막히자 고작 한다는 것이 길거리에 앉는 것이었다. 이 작은 행동조차도 신호등 불빛에 따라 법을 지켜 길을 건너오던 시민들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과 정부는 이런 작은 '범법'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기는커녕, 전경과 경찰들을 보내 도로를 점거한 것이 '불법'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연행하고 진압했다. 토요일 밤 광화문 거리에는 일반 시민들이 많았고, 전경의 살수 경고와 위협적인 구령소리에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가세해 우리를 둘러싼 전경들을 시민들이 다시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태를 심각하게 느낀 경찰은 1차 진압시도를 멈추고 새벽 1시 즈음에 물러났다.
그러자 1만명도 넘던 사람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고, 남은 사람의 수는 1천명 안팎으로 줄어들었다. 남은 사람들은 변변한 방송장비도 없이 확성기와 작은 스피커를 가지고 자유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살수차가 나온 것을 인터넷으로 보고 사태를 심각하게 느껴 새벽에 택시를 타고 나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엄마 몰래 나왔다는 고3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집회에 참여하지는 못해도 이를 지지하는 동네 슈퍼 아줌마의 간식 배달이 있었고, 곳곳에서 물과 먹을 것이 왔다. 또 근처 빌딩에서 야근하던 회사원이 야근을 마치고 집회에 동참하기도 했다.
새벽 3시쯤 촛불집회를 주최하고 있는 광우병대책위원장이 와서, 다음날인 일요일 2시에 공식 행진이 있으니 이제 들어가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이 없이 내일은 오지 않는다"며 야유를 보냈고 결국 위원장은 설득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오히려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침까지만 버티면 시민들이 더 모일 것이라며 2시 행사를 아침으로 당기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40대 후반의 한 아저씨가 자유발언에서 "진짜 적은 이명박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사태를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라는 일견 반미 선동적인 주장을 하자 곧바로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왜냐하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미국이 자기 이득을 추구하는 것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국민을 지켜주기보다는 미국을 옹호하기 바쁜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에 격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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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시민도 거의 없는 새벽 5시, 전경과 경찰들이 다시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광우병대책위원장은 다시 돌아와 경찰들이 강경진압을 하면 청계광장으로 이동하자며 충돌을 막고자 했고, 실제로 남아 있던 시민들 역시 지금까지의 집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점점 좁혀오는 전경들을 피해 조금씩 청계광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도 몇몇 시민들은 쓰레기를 남기면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을 줄까 봐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나도 쓰레기를 줍다가 원래 있던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가게 됐는데, 뒷자리는 상황이 달랐다. 뒷자리에는 청계광장으로 이동하자는 내용을 듣지 못한 30여명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전경들은 이들을 방패로 강제로 밀어내고 있었다. 전경 방패 앞에는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기지 못하고 '비폭력'을 외치며 그 자리에 같이 앉았고, 전경들은 사방에서 그 30여명 되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갑자기 사람들을 채가기 시작했다. 나는 제일 처음 연행돼서 다음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본보기로 모두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잡혀간 것을 보고 흥분해서 항의하다, 결국 같이 연행된 내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와 내 아내를 포함한 연행자 중 10명은 모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연행된 사람들은 모두 시위참가 경험이 거의 없는 소위 '운동권'과는 거리가 먼 학생과 직장인들이었다.
조사를 받기 위해 대기할 때, 옆에 있던 경찰관이 몰래 엄지를 들며 작은 목소리로 "잘했어, 잘했어"라며 미소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돈을 들여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공무원이라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대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조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유치장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유치장 내 인권보호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치장 내 경찰관들에게는 우리뿐만 아니라 거기에 온 사람들을 존중하고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자 조심하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다음날 같이 연행된 사람이 커피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유치장 경찰관이 그 사람뿐 아니라 연행된 사람들 모두에게 커피를 타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분이 '대안무역'을 얘기하면서, 생산자를 착취하지 않고 유통하는 '좋은 커피'를 주지 못해 미안하는 말까지 한 것은 너무 놀라웠다. 문득 이런 변화가 최근 10년간의 민주화 정권이 이루어놓은 드러나지 않지만 참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행된 사실을 알게 된 변호사 형이 와서는 노무현정부 때는 이보다 훨씬 심한 시위도 한두시간 만에 훈방했는데, 정권이 바뀌어서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대중교통도 끊어진 화요일 새벽 1시, 연행된 지 44시간이 되어서야 '불구속 수사' 상태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회사를 하루 빠지게 되었고, 이 일로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실제로 조사과정에서 같이 왔던 사람들은 다들 무직이라고 말해서, 직장에 다니는 내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들 직장이 있지만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차마 말을 못했던 것이었다. 순진한 나만 그렇게 회사 이름까지 당당하게 말했으니, 유치장에 있으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회사에서는 '안열사'라면서 나를 환영하고 격려해주었고, 월요일에는 상사가 면회를 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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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시대였던 1900년대 초에 《독립신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나라가 팔린 것은 지도자들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지도자들에게 바른 소리를 하기보다 그들에게 빌붙어 기생하려는 일부 국민들 때문이기도 하다는 내용이다. 나 역시 말로는 대운하를 반대하면서도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자 대우건설 주식을 샀으며, 국민들의 50%는 자기 집값, 자기 주식의 수익률 하나 바라보면서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한 채 지금의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뽑았다. 이 일을 통해서 잘못된 대통령, 잘못된 의원을 뽑아놓은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자기 집값 땅값, 자기 주식의 수익률 때문에 시민권, 민주주의, 도덕성을 포기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 그냥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더 깊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단순히 '돈이 되는 일'보다는 '건강하게 살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도덕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마음을 다해 지킨다면, 사람들 가슴속에서는 진정한 촛불이 타오를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람들의 촛불행렬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2008.6.4 ⓒ 안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