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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위기, 그리고 ‘새로운 진보’의 대안: 혼합경제체제로 가는 세발자전거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진보개혁세력이 대선에 패배한 지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은 새로이 출범한 이명박정부의 무능과 독선을 인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진보개혁세력은 수렁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없다. 12월 중순에 있었던 한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정당 지지도는 한나라당 25.3%, 민주당 8.4%, 민주노동당 2.1%, 자유선진당 1.5%, 무당파층 61.6%로 나타났다고 한다. 진보개혁세력이 더블스코어로 뒤처져 있는 것은 지난 대선 당시의 판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태풍처럼 들이닥친 세계 경제위기라는 조건은 진보개혁세력에게 새로운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명박정부는 위기상황을 빌미삼아 그간의 독주를 더욱 밀어붙일 태세이다. 여권이 대화를 거부하면 격렬한 충돌과 장외투쟁이 불가피할 것이고 각 분야의 현안들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현실적인 경제위기의 공포에 휩싸여 있으며, 고단한 일상 속에서 기세가 꺾여 있다. 진보개혁세력은 현재의 위기를 "그다음은 무엇?"이라는 물음과 연관시켜 풀어낼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업부도와 실업이 증가하는 상황은 파시즘의 토양이 될 수 있으므로, 진보개혁진영은 현실적인 진단과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위기의 원인을 너무 포괄적으로 진단함으로써 위험하고 실현되기 어려운 수술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신뢰를 구하기 어렵다. 흔히 위기의 원인을 금융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금융씨스템으로 거론하곤 하는데, 이런 진단은 처방의 범위를 너무 넓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반(反)금융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가 당면한 위기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함께 보여준 금융위기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파생상품의 지나친 확대에 있다. 2000년대초 IT버블 이후의 불황에 대응하여 미국 연방은행은 저금리 기조를 펴갔는데 이것이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늘렸다. 이러한 주택대출 채권을 근거로 해서 주택금융기관들은 주택저당증권(MBS)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전매했다. 2006년경 주택경기가 정점에 이르면서 써브프라임 대출이 늘어났다. 이 때문에 높아진 위험을 분산하기 위하여 채무를 분할하고 합성하여 새로운 증권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채무담보증권(CDO)이다. 더 나아가 이 증권의 부도위험을 보장해주는 신용부도스왑(CDS)이 발행되었다.


문제는 파생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위험의 존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의 분할과 합성이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시장실패와 정부실패가 함께 존재했다는 점이다. 씨스템 안에 독(poison)이 있으면 제거해야 하는데, 독이 어디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유동화가 진행되다 보니 독이 없는 증권조차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증권에 대한 청산요구가 일거에 쇄도함으로써 이들 증권의 발행자였던 거대기관들이 몰락하게 된 것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세계 유수의 투자은행들은 상업은행 씨스템으로 흡수되었고,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구제금융 조치가 실시되고 있다. 파생상품의 무분별한 확대에 대한 반성으로 금융씨스템에 대한 국가의 감독과 규제가 크게 강화되는 것은 당분간 세계적인 추세가 될 것이 틀림없다.


이번 금융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과 차별화되는 것은 각국 정부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금리인하를 통한 경기부양을 시도하고 있다. 이명박정부는 '작은 정부'를 내세우며 출범했지만, 자신들의 신념과는 달리 금융감독을 강화하고 재정지출을 대폭 확대하는 '큰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투자은행을 지향하는 자본시장통합법을 밀어붙인다고 해도, 이미 그 모델이 사라진 마당이므로 증권회사들의 몸집을 좀더 키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확대된 재정지출은 자신들이 잘 안다고 믿는 분야, 특히 토목건설공사에 집중 투입하여 빠른 경기부양 효과를 취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현실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진보’는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어떤 카드를 내놓을 수 있을까? 위기에 대응하고 위기를 넘어서고자 할 때, 어느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가?


첫번째 바퀴: 동아시아 지역경제협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국가를 넘어선 협력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에서 확인된 것은, 특히 한국처럼 크지 않은 규모의 나라는 독자적인 힘으로 세계적인 위기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비껴나 있었다. 파생상품은 미국과 유럽에서 주로 발전했는데, 단기 차입금이 많은 유럽의 소국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극심한 긴축의 고통에 직면했다. 중국, 일본, 한국은 투자은행이 주도하는 흐름에서 좀더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후발성의 이익'을 향유한 셈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규모가 작고 달러외채가 많은 한국은 상대적으로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향후 위기시에 미국, 중국, 일본과의 통화스왑을 확대하기로 한 것은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아직 안심하기 어렵다. 각국 정부의 금융씨스템에 대한 개입이 크게 강화되고 있지만, 이제 곧 위기가 진정되리라고 판단하기에는 때가 이르다. CDS 계약잔액이 60조달러를 넘는다고 하니, 기업과 상업은행의 파산위험이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른다.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인 공적자금 투입, 금리인하와 유동성 공급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압력을 축적하고 있다. 이제 우려되는 또 하나의 씨나리오는 달러가치가 급속히 하락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상하락이 불가피하겠지만, 달러가치가 단기에 급락하는 사태가 몰아닥치면 그 충격은 매우 심각할 것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한국은 '동아시아'를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등과의 스왑도 늘리는 한편, 동아시아 역내에서부터라도 통화와 자본의 단기적 이동을 늦추는 협력체계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 바퀴: 국가의 고용창출 노력과 교육투자


다음으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새로운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방안이, 재정을 복지분야에 쏟아붓고 이를 계기로 위기 다음에 복지국가의 틀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곧바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 같다. 복지국가가 지속되려면 높은 조세부담과 높은 고용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증세나 완전고용 조건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위기국면에서는 오히려 자본에 감세혜택을 제공하고 대신 고용창출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고용유지 및 확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놓고 이를 토대로 노동에 대한 소득세 증세나 사회보장세 신설을 통해 복지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복지확대를 위한 조세는 인쎈티브를 저해하는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래서 복지확대에 앞서 교육투자에 대한 재정을 대대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조세의 부정적 효과를 줄이는 방안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복지지출을 보편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제도설계가 필요한데, 교육투자의 집행에는 상대적으로 시간과 비용이 덜 소요된다는 장점도 있다. 적어도 초·중·고 단계에서는 공교육 체제가 유지되고 있으므로, 외국어처럼 상당한 투자가 필요한 부문의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면 교육효과는 물론 고용효과도 함께 거둘 수 있다. 그리고 지방에 국가재정을 투입하여 이공계를 중심으로 한 실업교육―고등교육 체계의 거점을 형성하도록 한다. 국가가 주도하여 지방에 정예의 교육씨스템을 제공한다면, 교육의 공공성도 높일 수 있고 수도권으로의 산업집중에 대한 지방의 소외감을 해소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번째 바퀴: 혼합형 경제조직


산업 차원에서 대안적 성장동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에서는 재벌 대기업이 중심이 되어 경제가 발전해왔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더이상 성장엔진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재벌의 국내 산업연관 효과는 감소했고, 다각화 주체로서의 투자자 역할도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총수 일가의 지분비율이 감소하여 이른바 '대리인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하면 내수확대, 고용창출, 안정성 증진, 격차축소, 사회통합 같은 목표는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꼭 국가의 보호나 지원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사회써비스 부문도 이제 성장동력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이를 육성하기 위해 반드시 국가복지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써비스를 국가가 직접 담당할 경우 그 공급비용이 크게 상승한다. 사회써비스는 속성상 그 품질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써비스는 공급조직 내·외부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 신뢰도가 높은 혼합형 조직(hybrid organization)이 더욱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혼합형 조직은 시장과 기업조직이라는 양극단의 중간에 존재하는 중간형 조직이다. 이는 자원의 공동이용, 계약, 경쟁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네트워크, 공동브랜드, 파트너십, 협동조합, 전략적 동맹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혼합형 경제조직은 격차해소에도 비교적 유용성을 나타낼 수 있으며,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을 구하는 데도 이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생명공학산업 같은 첨단분야 기업들은 연구개발을 위한 다른 기업들과의 파트너십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 혁신능력과 자체 브랜드파워에 취약성을 보이는 중소기업이라든지 정보씨스템과 물류씨스템에서 뒤처진 전통적 도소매업에도 혼합형 조직이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진보개혁세력이 위기를 넘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새롭게 구성된 혼합경제(mixed economy)이다. 여기로 가기 위해서는 이동수단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를 지역협력, 국가, 혼합형 조직이라는 세 바퀴를 가진 '세발자전거'(tricycle)라 말하고 싶다.


2008.12.24 ⓒ 이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