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미디어법 판결 이후, 국회는 무엇을 하나
하승창 /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운영위원장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천정배, 최문순, 장세환 민주당 의원이 지난 20일 전주, 주말의 제주를 시작으로 언론악법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전국 순회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의 싸움은 요란한 4대강사업 기공식과 세종시 논란에 가려 시작부터 정국의 뒤편에 머물러 있다. 헌법재판소가 신문법과 방송법에 대한 민주당의 권한쟁의심판 청구에 대해 권한침해는 인정하되 미디어법의 무효청구는 기각한 이후 세 사람의 질긴 노력으로 공방은 이어지고 있지만 문제 해결의 노력은 무소식이다. 4대강 개발과 세종시 논란으로 미디어법 문제가 덮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미디어법 문제가 4대강 개발이나 세종시 이전에 견주어 우리 사회에 작은 사안이라 할 수 있는가?
헌재가 국회의 법안 처리과정에서 대리투표와 재투표 등의 불법한 사실이 있어 처리는 위법하나 무효청구는 기각한다고 결정하자, 이는 법안 처리과정은 위법하나 그 법안은 유효하다고 판결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곧바로 헌재 판결을 비웃는 네티즌의 패러디들이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 입학시험에서 대리시험을 치른 것은 분명하지만 합격은 유효하다는 우스갯소리는 헌재 판결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지는지 잘 보여준다.
알쏭달쏭한 헌재 판결, 더 기이한 한나라당의 해석
이같은 정치적 결정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헌재는 국회 법사위에 출석한 사무처장 발언을 통해 판결문 어디에도 미디어법이 유효라고 한 적이 없다고 친절하게(?) 해설해주었고, 이석연 법제처장도 국회가 재논의해 위법문제를 치유하라는 의견이라고 좀더 분명히 추가해설을 해주자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이런 친절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헌재 사무처장의 발언이 헌재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니며, 헌재의 공식 견해는 무효청구를 기각한 것이므로 미디어법은 유효라고 우기고 있다. 헌재가 판결문 속의 비겁한 타협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우회적 발언으로 면피하려는 태도도 옹졸하지만, 헌재 사무처장이 국회라는 '공식적 공간'에 출석해 미디어법이 유효라고 한 적이 없다고 공언하는 데도 한나라당이 헌재는 유효라고 판결했다고 고집 피우는 것도 한심하기만 하다.
이런 논란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의장은 자신의 책임하에 진행된 것이라고 해놓고도 그 과정이 위법하다는 판결에 대해 일언반구 사과가 없고, 집권당은 그 과정이 불법이라는 데도 법안이 유효하다고 뻗대는 기이한 일이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식과 합리성에 어긋나더라도 힘을 가진 자가 결정하면 곧 합법적이 되는 세태가 새로운 룰이 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엉망이 될 것인가. 정부와 한나라당은 미디어법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근간인 절차의 정당성은 내버리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대통령이 국격(國格)을 높일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침을 주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말의 본뜻이 담긴 방안이 나올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절차의 민주성 무시하는 국회에 누가 권위를 인정할까
헌재가 굳이 국회 발언을 통해 '유효라고 해석한 적이 없다'고 밝힌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수호해야 할 민주적 절차를 자신의 판결문이 무너뜨리고 있다는 비판에 분명하게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탓이리라.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이를 애써 무시하는 상황은 지난 20년간 절차의 민주성만큼은 굳건하게 자리잡아왔다는 사회적 신뢰가 생각처럼 그리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더구나 헌재가 과정의 불법성을 지적했음에도 입법부가 이를 바로잡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헌재 판결을 무시하는 처사로서 헌재의 위상에 손상을 입히는 것임은 물론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근간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이다. 이는 4대강 개발이나 세종시 논란에 밀려 사회적 논의의 장에서 사라져서는 안되는, 공동체 운영과 직결된 근본적인 문제이다.
정녕 국회는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마저 무시하고도 자신들이 만드는 법의 권위가 인정받기를 바라는가 묻고 싶다. 국회의장은 그런 국회의 수장 노릇이 자랑스러운 일인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장외에서 미디어법 무효를 외치고 있는 세 사람의 행보는 현재 상태의 국회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상징성도 담고 있다. 국회의장은 장외에서 활동중인 세 사람의 의원직 사퇴서를 처리할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국회에 들어와 문제를 풀어갈 공간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회가 정상적인 논의 공간이 되도록 하는 국회의장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이다.
국회는 다시 제대로 논의하고 정상적 절차 밟아야
지금의 미디어법은 '불법적으로 통과되었지만 유효하다'라고 우기는 법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지금 당장 민주적 절차의 왜곡에 대한 각계각층의 비난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향후 국회가 제정하는 법의 최소한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미디어법을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 다시 만들어야 한다. 공동체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 국회가 만드는 법의 권위가 사회적으로 수용되도록 하는 막중한 일에 국회의장과 한나라당은 무겁게 임해야 한다. 정부와 한나라당의 태도 변화가 없다면 그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어떤 불법적 과정을 거친 일이라도 권력자의 '합법' 승인을 받는다면 모두 유효하다는 상식 아닌 상식을 만들어내고 결국 공동체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어버린 정치집단이라는 오명을 화인(火印)처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2009.11.25 ⓒ 하승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