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일본의 민주당정권 6개월: ‘탈아’와 ‘입아’ 사이에서
손열 /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3월 16일은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지지신보(時事新報)》에 저 유명한 〈탈아론(脫亞論)〉을 게재한 지 꼭 115년째 되는 날이다. 또한 작년 선거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출범 6개월이기도 하다. 하또야마 내각은 과거 자민당정권의 과도한 미국의존 외교로부터 탈피하여 좀더 주체적이고 아시아중심적인 외교를 펼쳐나가겠다고 공언해왔다. '탈아(脫亞)'를 탈(脫)하여 '입아(入亞)'하겠다는 것이다. 자고로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는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다는 점에서 19세기의 '탈아'가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화 추진전략의 대외적 표현이라면, 21세기 '입아'는 새 일본의 구축을 위한 "헤이세이(平成, 현 아끼히또 천황의 연호) 유신"의 주요전략이 될 것이다. 과연 민주당정권은 지난 6개월간 이런 방향으로 일본을 이끌어왔는가. 일본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19세기 말 후꾸자와가 탈아론을 주창한 배경에는 서양화(化)를 하지 않으면 서양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양의 구체제로는 더이상 독립을 지킬 수 없다는 위기감이 무혈의 메이지유신을 가능케 했고, 서양문물을 적극 도입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을 열었다. 여기서 후꾸자와의 역할은 혁명적이었다. 그는 서양의 길을 새로운 문명의 표준으로 설정했다. 서양을 '금수(禽獸)'에서 '문명'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서양 표준을 추종했던 일본 근대화 백년
후꾸자와는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문명개화의 길을 함께 걸어야 마땅하나 불행하게도 한국과 중국 같은 이웃이 구습의 고루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한다. 일본은 이들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아시아를 일으킬 시간이 없으므로 "동방의 악우(惡友)"를 떠나 홀로 신문명의 표준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탈아 속에서의 아시아 관계는 과거 순치보차(脣齒輔車, 입술과 이, 수레바퀴와 덧방나무처럼 밀접한 사이)의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 서양이 동양을 대하듯 문명 대 야만이라는 보통의 관계가 된다.
일본이 서양을 문명의 표준으로 삼아 국가전략을 짜나간 지 백여년이 흘렀다. 1930년대 서양과의 충돌 속에서 협동체 또는 공영권 담론을 통해 일본적 가치를 지역 문명의 표준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처참하게 실패한 때를 예외로 하면 일본은 일관되게 서양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19세기 탈아가 유럽의 문명을 표준으로 삼았다면, 1945년 이후 탈아는 미국의 그것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냉전기 미일동맹은 단순히 군사적 장치가 아니라 미국과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역을 엮어가는 문명적 프로젝트였다. 동맹은 미국이 일본에 군사적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대신 일본이 미국적 삶을 충실히 따르고 지지하게끔 하는 패권적 장치였다.
또한 9·11사태를 계기로 본격화한 부시정권의 글로벌동맹 네트워크 구축작업은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네트워크를 봉쇄하고,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패권적 변환 노력이었으며, 미일동맹은 그 핵심고리의 지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미일간 동맹변환(alliance transformation)은 21세기 미국문명의 군사적 기초였던 것이다.
미국식 시장문명에서의 이탈 선언, 그 다음은?
2009년 9월 등장한 민주당정권은 과거 자민당정권의 '탈아'를 벗어나겠다고 공언해왔다. 미국이 주도해온 시장자본주의 문명--혹은 폴라니(K. Polanyi)가 말하는 19세기 시장문명의 재현--을 넘어서 고용안정, 식품의 안전, 환경 등 사회적 가치를 담는 새로운 사회모델의 일부로 경제를 고려하는 이른바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재구축하고 자립과 공생에 기반한 동아시아공동체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새 정권은 '탈아'의 문명, 즉 미국식 시장문명이 더이상 일본에 문명의 표준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입아'의 문명적 조건(표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한 지경이다. 그 모호함은 일본으로 하여금 대미관계와 동아시아관계의 변환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민주당정권 6개월을 쉼없이 달구고 있는 후뗀마(普天間) 미 해병대기지 이전 문제는 주둔지인 오끼나와 주민의 비원을 담고 있는 동시에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의 글로벌동맹 네트워크 구축작업과 연결되어 있다. 일본이 대등한 대미외교, "노(No)라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면, 미국은 글로벌동맹 네트워크의 핵심인 미일동맹의 변환 차원에서 보고 있다. 기지를 헤노꼬(邊野古)로 이전하는 기존 합의의 백지화를 동맹변환의 재조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정책에 여전한 경제중심적 논리
문제는 대등한 관계를 재구축하려는 일본의 노력이 또다른 차원의 노력, 즉 동아시아 외교의 강화와 연결되어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이 미국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갖는다고 해서 미국의 상대적 비중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며, 또 동아시아 외교를 중시한다 해서 미국과의 불균등한 관계가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후뗀마 기지 이전이 양국간 논란이 되는 가운데 민주당의 실력자 오자와 이찌로오 간사장이 대규모 방중단을 이끌고 뻬이징을 방문하자 미국은 일본이 동아시아 중시(중국 중시) 외교로 전환하는 일환으로 후뗀마 문제를 보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정권은 미국의 패권적 고려로 구축된 글로벌동맹 네트워크에 대해 입장 표명이 어렵다. 미국으로부터의 자주(自主)는 너무나 큰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침체일로의 경제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또 동아시아공동체를 말하고 있으나 이것이 과거 코이즈미 수상 시절의 동아시아공동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구체적 구상을 내놓기도 어렵다.
현재 일본의 동아시아정책은 동아시아시장의 확대에 따라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경제중심적 논리에 입각해 있다. 특히 세계 금융위기 이래 가속화되는 동아시아 쏠림현상에 편승하는 측면이 강하다. 일본경제의 회복과 성장에 중국경제가 사활적 역할을 하리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또한 대등한 미일관계 구축 역시 전통적인 주권국가간 논리, 국내정치적 논리를 넘는 신사고에 입각해 있는 것 같지 않다.
단순한 균형 회복인가, 신문명의 창조인가
민주당정권의 외교정책은 재균형(rebalancing)에 머무르고 있다. 과도한 대미의존의 균형잡기, 종속적인 대미관계의 균형잡기 차원의 노력이다. 그러나 정권의 성패는 결국 21세기에 펼쳐지는 신문명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달려 있다. 주권국가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대등한 미일관계란 한계를 갖는 '탈-탈아'이다. 또한 시장확보를 위해 아시아로 들어온다면, 이 역시 한계를 갖는 '입아'이다.
19세기 '탈아'가 그랬던 것처럼 21세기 '입아'는 문명에 기반할 때 비로소 성공할 것이다. 신문명은 근대 국제체제 내에서의 힘의 균형이란 사고를 넘어서 동아시아와 미국을 동시에 엮는, 또한 국가를 넘어 다양한 행위자들을 함께 엮는, 네트워크적 사고에 기반한 주권론을 담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의 힘(경제력)의 이동이란 사고를 넘어서 물질적 성장, 소득격차의 축소, 환경보호, 안전 등 복수의 가치를 동시적으로 추구하는 복합적 자본주의일 것이다. 일본의 과제는 동아시아라는 공간적 맥락에서 이러한 신문명의 표준을 창조하는 21세기 후꾸자와를 찾아내는 일이다.
후꾸자와는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살았다고 적고 있다. 전통의 삶과 근대의 삶이 그것이다. 21세기 후꾸자와 역시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살아야 한다. '탈아'에 이은 '입아'의 삶은 무혈의 헤이세이 유신에 달려 있다.
2010.3.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