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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 고려대생 ‘대학거부’ 선언을 보며

김사과 / 소설가

김예슬씨의 대자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건 강렬한 기시감이었다. 십년 전 봄 고등학교를 그만두던 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이 방금 꾼 꿈처럼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무렵엔 뭔가 전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교육부 장관이 야심찬 실험을 실행중이었고, 평범한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오기 시작했으며, 대안교육이라는 낯선 단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역시 학교를 뛰쳐나온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봤을 때는 학교를 거부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사회의 전복을 기도한 것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엔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제가 존재했다. 서열화된 대학을 정점으로 한 극단적인 경쟁씨스템과 그 속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열악한 삶이 그것이다.


경쟁씨스템을 거부하는 학생들


매년 수능 무렵이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연례행사처럼 뉴스를 장식한다. 하지만 잠깐 주목을 끌 뿐 쉽게 잊혀진다. 그런 분위기에서 스스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나였다.


내가 선뜻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나보다 앞서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내겐 갈 곳과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때의 그 시간들을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해본다면 ‘잉여’와 ‘중2병’의 중간쯤 어디에 놓이는 한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나 자신도 그 결정과 뒤이은 상황들을 가볍게 사적인 경험으로 묘사하곤 했다. 아니, 사실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었다고, 단지 즉흥적인 결정에 불과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깨달은 바가 있다. 모든 일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은 모든 일을 거창하게 취급하는 것만큼이나 기만이라는 사실을.


내가 순간의 기분에 이끌려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는 건 그때 내가 읽은 책의 목록이나 학교를 떠난 뒤의 나의 행적들로 입증된다. 그런데 왜 난 그것을 지극히 사적인 선택으로 축소시키려고 애를 썼을까. 돌아보면 역시 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벌어질 골치아픈 일들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난 입을 다물고 조용히 교문을 빠져나왔다.
 
이제와서 내가 이렇게 주절주절 과거사를 늘어놓는 것은 뒤늦은 자아비판을 하려는 것도 변명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김예슬씨의 선택과 나의 선택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탈학교 운동의 귀결, 대학으로의 안착

탈학교 운동은 실패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의견이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반박도 숱하게 존재할 것이다. 끝내 대학에 진학하지 않거나 진학한 뒤에도 비슷한 활동을 계속해가는 이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난 실패했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결국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등학교를 떠났던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공교육 개혁은 실패했고, 그것을 이끌던 장관은 바뀌었고, 대안교육은 특목고와 함께 중산층 부모의 또하나의 값비싼 옵션이 되어버렸다. 함께하던 아이들은 대입검정고시와 수능과 합격자발표와 대학입학식을 거치며 뿔뿔이 흩어졌고, 공유하던 문제의식은 바쁜 대학생활 속에 흡수되었다. 남은 것은 몇몇 추억과 친근한 사적관계들뿐이다.


몇년 전,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십대들을 만날 일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는 대학에 가라는 것뿐이었다. 순간 막다른 골목에 몰린 느낌이었지만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 똑같은 감정이 김예슬씨의 대자보를 읽는 나를 사로잡았다. 난 씁쓸하게 인정해야 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걸 말이다.


이건 확실히 예견되어 있던 일이다. 수천만원짜리 명문대 졸업장을 따는 것이 더이상 성공의 열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모두가 여전히 그 좁은 구멍에 몸을 쑤셔넣는 것은 결국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른 길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아마도 그때의 나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당장의 삶의 고민들을 해결하느라 바빴고, 그 고민들이 실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결국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그 댓가로 난 바라던 대졸자가 되었고 내 이름으로 된 몇권의 책도 갖게 되었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철저히 나 자신에게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상황은 더 나빠져만 가는데 난 생활에 골몰하는 한명의 소심한 공범자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그러곤 부끄러워하며 생각한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렇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용기있는 거부와 긴 토론의 시작

얼마 전 발간된 《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 김용철은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벌인 이 모든 일들이 한갓 야사에 불과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탄한다. 난 비슷한 한탄을 이 글을 쓰면서 하고 있다. 물론 그와 나는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오히려 이 글의 주인공 김예슬과 비슷한 처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된다. 이 모든 것도 한갓 야사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내일이면 잊혀질 조금 특별했던 사건사고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직은 낙관적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신의 선택을 선언으로 옮김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비난과 무시가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88만원 세대》 이후로 어떤 발언과 토론회도 이 정도의 깊고 광범위한 파장을 학생사회에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러니 그녀가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이 선언을 함께 나눌 협력자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해서 또다른 선언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흘러 이 모든 일이 슬픈 영화의 로맨틱한 회상장면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모두에게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개인의 용기있는 선택이 사적으로 전유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이것은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이다.


2010.3.2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