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당신들의 욕망
김사과 / 소설가
지난봄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 2〉를 봤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코미디가 존재하겠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만큼 보는 사람을 처참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런 식의 코미디는 내가 이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이 전혀 아니다. 카메라가 서울의 씨티스케이프를 훑고 지나가는 도입부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난 신념을 가진 한 지식인의 비극적인 파멸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송두율의 귀국이 ‘스캔들’로 변질되고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코미디로 장르를 변경한다.
영화가 비극에서 희극으로 점핑하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은 왕년의 민주화 인사 중 한명이 송두율의 귀국과 내년 총선을 연계시키는 말을 내뱉은 때였다. 그 순간 나는 한국 민주화 인사들의 실체를 코앞에서 목격할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그들과 같은 곳에 있는, 그들과 한편이라고 생각되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어야 할 송두율은 철저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송두율의 침묵, 주변인들의 고함
그는 종종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 의자 위의 방석처럼 얌전히 놓여 있는 송두율은 실재하는 인물이라기보다 환영(幻影)에 가깝다.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그를 제외한 사람들의 입은 더 커지고, 목소리는 더 높아져간다.
침묵하는 송두율이 유령처럼 흐릿해지는 사이 유일하게 선명해지는 것은 송두율의 귀국이라는 '아이템'을 잘 포장하여 팔아보려는 그를 둘러싼 민주화 인사들의 욕망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송두율의 성공적인 고국 방문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들이 이루어낸(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민주화를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환기시킴으로서 다음해의 총선에서 많은 표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 그들이 송두율을 반겼던 것은 그의 존재 자체를 지지해서라기보다는 그가 팔릴 만한 물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내내 송두율을 한 인간이 아닌 하나의 사물--그들이 소유한, 즉 일종의 전리품처럼 취급한다. 그러니 송두율이 이 영화에서 환영 또는 부재 바로 그 자체인 공백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민주화된 고국에서 송두율이라는 이름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계몽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뭐였는지 사실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내가 영화에서 목격한 것은 송두율과 민주화 인사들을 둘러싼 풍경의 구조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존재를 철저하게 사물화하여 점유한 뒤 소모해버리는 그 구조와 그 뒤에 숨은 욕망. 난 송두율을 둘러싼 민주화 인사들의 모습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세계를, 사람들을, 나아가 이십대라는 환영을 대하는 태도이다. 아니 이십대를, 세계를, 송두율을 하나의 환영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들의 반복강박이다. 그 반복강박이란 다름아닌 타자를 계몽해야 한다는 욕망이다. 잘못된 것은 모두 자신의 외부에 있고, 그것을 뜯어고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식의 이 사고방식은 '국민 개새끼론'이나 '이십대 개새끼론'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이 한국사회를 개선할 완벽한 비전과 방법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이를 의심하는 자들은 세상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덜떨어진 자들이고, 만약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그들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은 언제나 아직 제대로 계몽되지 못한 미성숙한 타자들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송두율의 침묵, 젊은이들의 무능력, 국민들의 속물성과 무지함 따위를 탓한다. 그들은 언제나 타인들을, 외부의 조건들을, 세계의 모순들을 증오하며 그들 자신이 바로 그 조건들 가운데 일부임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의심 없는 신념이 놓친 자기성찰
그들은 세상을 해석하고 투쟁하는 것에 온 생애를 바치느라 정작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스스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바깥을 향할 뿐, 자신 또한 변화와 투쟁의 대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싸우고, 사회를 바꾸고, 무지한 자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 존재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섣불리 타인을 계몽하려고 들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드레날린 정키'처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뛰고 또 뛸 뿐이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끊임없이 계몽시킬 타자를 찾아내지 않으면 스스로의 정체성조차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희생물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건 송두율이기도 하고 이십대이기도 하고 촛불소녀이기도 하다. 특히 이십대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발견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십대는 그들과는 정반대로 도무지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중2병'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돌아가 스스로를 바라보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젊은이들에게서 나이든 계몽주의자들은 암흑의 핵심을 발견한다. 세계의 모든 비참과 절망이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어 그곳에서 끝난다. 안전한 자신만의 방에서 나온 적이 없는 젊은이들은 수십년 만에 고국을 찾아온 송두율만큼이나 세상물정에 어두운, 즉 계몽되어야 하는 최후의 미개인들인 것이다. 그러니 이십대들이 시큰둥하게 반응하면 할수록 사명감과 열정이 이 계몽주의자들의 심장을 죄어오는 건 자연스럽다. 저 불쌍한 자들을 계몽시켜야 한다!
얼마 전 인터뷰집 《정치를 말한다》에서 카라따니 코오진이 운동이든 모임이든 습관적으로 계속 해나가기보다 해체를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더 낫다고 한 것을 읽었다. 나는 우리의 나이든 계몽주의자들이 이 말을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발 당신들의 욕망을 타인들에게 투사하기를 그만두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거울 앞에서 자신이 어떤 종류의 '괴물'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불안하다고? 걱정이 된다고? 걱정할 것 없다. 당신들 없어도 바깥세상은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아니, 당신들이 떠나간 자리에서만이 비로소 새로운 것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건 너무 쓸쓸하다고? 원래 세상이란 게 그런 거다.
2010.6.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