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6‧15시대는 계속됩니다
이 글은 지난 6월 15일 '6·15공동선언 발표 10주년기념 평화통일민족대회'에서 백낙청 명예대표가 발표한 '격려사'입니다. 천안함사건이 몰고온 남북관계의 위기에 대한 진단뿐 아니라 합조단 발표와 감사원 감사결과에 대한 문제제기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글입니다--편집자.
백낙청 /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명예대표, 서울대 명예교수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친애하는 6·15남측위 동지 여러분, 국민 여러분, 그리고 7천만 동포 여러분.
6‧15공동선언 발표 10주년이 되는 오늘, 북과 해외의 동포들과 더불어 민족공동행사를 하지 못하고 남측위원회 단독으로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어 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이 남북교류가 거의 전면적으로 단절된 사태 때문이기에 서운함을 넘어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6‧15공동선언을 오랫동안 무시하고 폄하해오던 우리 정부가 최근에 드디어 선제적인 교류단절 선언까지 한 탓에 이런 사태가 야기되었다는 점에서 통탄과 더불어 분노마저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6·15시대는 여전히 계속됩니다. 6·15공동선언이 민족의 장전이요 한반도 평화의 초석으로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는 그런 막연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6·15시대'라고 할 때 저는 구체적으로,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시작하여 아주 멀지는 않은 장래에 남북이 국가연합을 선포함으로써 1단계 통일이 달성될 때까지의 특정한 시간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6·15시대가 지금 한창 진행중이라는 것입니다. 당장은 다음 시대의 갓밝이를 앞두고 어둠이 가장 짙어진 시각입니다. 그러나 한번 동이 트기 시작하면 밝은 햇살이 온누리를 덮는 것은 잠깐입니다.
사람이 시련을 겪으면서 그 깜냥이 드러나듯이 6·15공동선언의 진가도 6·15에 대한 훼손작용이 극에 달했을 때 빛을 냅니다. 천안함사건 합동조사단의 발표에 이어 지난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서 발표한 특별담화는 6·15선언은 물론이고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이래 20년이 넘게 진행되어온 남북화해의 온갖 조치들을 일거에 뒤엎는 내용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른바 북풍을 일으켜 6·2지방선거에서 민주·평화세력에 궤멸적 타격을 안기고 분단체제 기득권세력의 일방통행을 영구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민심의 판결은 어땠습니까. 유권자들은 '북풍'에 흔들리지 않고 마땅히 심판해야 할 정권을 심판했으며, 독재가 아닌 민주,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실은 선거 전에 이미 대통령 스스로 전쟁불사론에서 뒷걸음질치기 시작했습니다. 민심에 둔감한 정권이지만 전쟁위험이 경제위기를 악화시킬 조짐 앞에서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지난 10년간, 경제를 포함한 이 나라 국민생활이 6·15공동선언이 안겨준 평화와 남북협력을 바탕으로 영위되어왔음을 말해줍니다. 5·24담화 직후의 교류중단조치들이 개성공단을 예외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그렇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른바 '접적지역(接敵地域)'에서 오히려 야당의 진출이 두드러졌던 것은 또 무엇을 뜻합니까. 그런 지역일수록 6·15시대가 깊숙이 체질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6·15시대 이전의 대결상태에서는 대한민국 전역이 일종의 접적지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6·15공동선언과 후속된 여러 조치들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첫걸음을 내디뎠고 덕분에 민주화와 경제발전이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6·15공동선언이 당연시되던 시기에 그 고마움을 몰랐던 것뿐이지요.
6·15시대의 끈질긴 지속을 제가 확신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한반도를 대결의 시대로 되돌리려는 최근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허술한 근거로 출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이 비핵화를 해야만 남북교류를 하겠다는 것은 비록 오만하고 현실성도 없는 고집이었지만 적어도 그것은 북이 핵무장을 하고 있다는 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24담화의 근거가 된 천안함의 어뢰피격설을 우리는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한국의 중요 교역대상국이자 동반자관계를 자랑하는 나라들의 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의 전문가와 양식있는 시민들 가운데 합조단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왜 이렇게 많습니까.
합조단 발표에 대해 제기된 의문점을 열거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구나 대부분의 관련정보와 증거물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천안함 침몰의 정확한 원인규명은 외부의 그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저 자신의 경우는, 설혹 모든 것이 공개되더라도 명확한 판정을 내릴 전문성이 없기도 하지요. 다만 이성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국어의 독해에 골몰해온 문학평론가로서, 당국의 발표에 믿음이 가지 않는 게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실한 보고--그것도 정부 스스로 중간발표에 불과함을 공언하는 보고--를 바탕으로 남북간의 모든 합의를 뒤엎고 북에 대한 적대행위를 불사하겠다는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인간의 기본 임무요 교양인 것입니다.
며칠 전 감사원의 감사결과 발표도 같은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정부의 대응과 합조단 발표에 불만이 쌓인 상태에서 군 당국의 태만과 허위를 지탄하고 상당수 장성의 징계를 요구한 조치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합조단 발표내용의 진실성 여부입니다. 어째서 실물증거나 정황증거에 그토록 어긋나는 발표가 이루어졌으며 만약에 발표가 조작이라면 누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짓을 했느냐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고 시각에 최고위급 장성이 술에 얼마나 취해 있었느냐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지요. 설혹 만취했던 게 사실이라도 당자의 그날 일진(日辰)이 고약했던 것으로 돌리고 적당한 징계조치를 취하면 그만입니다.
합조단의 중간발표가 진실이라는 대전제로 감사가 진행하다보니 감사원 발표는 새로운 의혹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당시에 북측에 특이동향이 있는데도 없다고 보고서를 조작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특이동향이 없었다고 발표한 미군 당국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어뢰피격 사실을 국방장관은 4월4일에야 알았고 대통령이 언제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감사원장이 국회에서 진술했는데 이런 부실한 감사를 한 감사원은 누가 감사해야 하나요?
감사원 발표에 대해서도 제기된 의문들을 여기서 다 들먹일 생각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 자신은 기본적인 상식과 한국어의 독해에 대한 약간의 능력 말고는 아무런 전문성도 없는 일개 시민으로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6·15시대가 우리 삶의 일부로 체질화된 결과 이제는 과도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서는 6·15정신을 파괴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우리가 가져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위기에 처한 6·15정신을 지켜내고 6·15시대의 순조로운 진행을 복원하는 일차적 임무는 우리 남측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남녘의 민간사회가 한반도문제 해결의 '제3의 당사자'라는 분명한 자기인식을 갖고, 남과 북 어느 당국에도 예속되기를 거부하면서 남녘 시민으로서 남측 정부의 행태부터 바꾸어나가는 데 주력할 때입니다.
이 과정에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한편으로 민족공동위원회의 일원이라는 독보적 위상과 다른 한편으로 남녘 비정부단체로서 불가피한 한계도 아울러 지닌 특이한 존재입니다. 지금은 5·24담화의 직접적인 피해자의 하나로서 6·15선언 10주년기념 공동행사조차 개최 못할 만큼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과 우리 자신의 입지를 냉철히 직시하면서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해 정성과 슬기를 모아간다면 머잖아 6·15시대의 보람찬 결실을 보리라고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10.6.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