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슈퍼스타K2〉라는 치명적 판타지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케이블방송 엠넷(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2〉가 지난주 금요일밤 '일단' 막을 내렸다. 135만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대국민 오디션'을 보았고, 그중 11명이 선발되어 매주 대결을 펼쳐 두세명씩 탈락했으며, 최종회에서는 마지막 남은 둘 중 한명이 '슈퍼스타K'의 자리에 올랐다. 케이블음악채널의 프로그램이 최초로 공중파의 모든 프로그램을 제치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슈퍼스타K2〉의 높은 인기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음주가무와 노래방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반영된 일반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왜 하필 〈슈퍼스타K2〉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의 놀라운 인기비결은 오늘을 사는 대중의 감수성을 가장 극적으로 자극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35만명 가운데 단 한명이 선택되고, 그 '슈퍼스타'가 모든 영광을 독차지한다는 이 프로그램의 기본틀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겪는 삶의 형식인 것이다. 삶의 모든 부면을 무한경쟁의 씨스템이 철저히 장악해버린 시대에는 살아간다는 것이 곧 살아남는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이 시대의 대중문화가 '써바이벌' 형식을 지배적인 구조로 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써바이벌 게임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대중
경쟁과 탈락, 생존과 죽음을 테마로 하는 써바이벌 형식은 사람들의 실제의 삶에서는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낳지만, 대중문화는 이를 엔터테인먼트로 변형시킴으로써 즐거움, 도전, 성공, 그리고 감동의 서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써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이들이 결국 같은 구조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그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다. 모두가 겪는 일이라면 나도 괜찮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구조를 비판하기보다는 열심히 노력해서 승자로 우뚝 서는 일이 된다. 〈슈퍼스타K2〉는 써바이벌 자본주의시대를 가장 충실하고 드라마틱하게 형식화하는 텍스트다.
〈슈퍼스타K2〉가 매회 강조하는 "134만 6402명 중 단 한명"이라는 문구는 이러한 맥락에 놓여 있다. 사실 이는 로또게임의 형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또가 무조건적인 '행운'을 유일한 게임의 조건으로 하는 데 반해 〈슈퍼스타K2〉는 '재능'과 '노력'을 승자의 요건으로 삼는다. 가수로서의 재능이 없거나 노력하지 않는 자는 이 엄청난 규모의 오디션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탑11'에 들고, '탑4'에 들고, 또 '슈퍼스타'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재능과 성실성을 갖춰야만 한다. 이번에 '슈퍼스타K'로 등극한 허각에게 대중이 지지를 보낸 이유는 그가 이른바 '연예인'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임에도 멋진 목소리를 지녔고, 환풍기를 설치하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갖춘 귀공자 타입의 라이벌 존박과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대중이 허각에게 보낸 압도적 지지는 써바이벌 자본주의하에서 대중이 실제로 욕망하는 바를 슬쩍 드러낸다. 그것은 아무리 무한경쟁이 지배적 형식일지라도 성공은 재능과 성실성을 갖춘 이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정의에 대한 요구'다. 각종 비리가 드러나 낙마한 국무총리 내정자나 딸을 특채로 입사시켰다 사퇴한 외무부장관을 주인공으로 하는 최근의 스캔들은 우리 사회의 경쟁구조가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공공연한' 사실을 다시 보여주었고, 대중은 '문자투표'로써 자신들이 바라는 공정과 정의를 다른 맥락으로 표출한 셈이다.
모두에게 열린 기회, 그러나 스타는 단 한명
이러한 대중의 요구는 한편으로는 '정의'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대 자본주의의 '판타지'가 대중을 문화적으로 포섭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혈통이나 신분 같은 조건이 아닌,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이들이 성공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통해 모든 사회적인 것을 사유화하는 자신의 야만적 속성을 감춘다. '환풍기를 달며 노래하던 청년이 꿈을 이루는' 〈슈퍼스타K2〉의 서사는 이러한 판타지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폴 포츠와 켈리 클락슨이라는 써바이벌 프로그램의 신데렐라들이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영국과 미국에서 나타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월드컵이나 올림픽에서의 '영웅 만들기' 역시 〈슈퍼스타K2〉와 사촌지간이다. "기적을 노래하라"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기적' '꿈' '영웅' '스타' 같은 신화적 언어가 힘을 발휘한다.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들이 '기적'이나 '영웅'을 외칠 이유는 없다.
〈슈퍼스타K2〉가 지닌 치명적 매력은 이 판타지를 성취할 기회를 '모두'에게 열었다는 데 있다. '누구라도' 재능이 있다면 슈퍼스타가 될 기회를 갖는다는 이 '평등'의 요소는 기실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다. 그러나 플라톤이 예측한 것처럼 모두에게 평등한 쾌락을 약속하는 민주주의는 갈등과 무질서를 낳을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재능과 노력만 겸비하면 경쟁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판타지를 요청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하나의 몸체를 가진 샴쌍둥이가 된다. '대국민 오디션'과 '문자투표', 선거결과 보도를 방불케 하는 '여론조사' 등 이 프로그램의 핵심요소들은 민주주의에 담긴 평등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재현하고 있다. 결코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이 민주주의적 열망은 치열한 경쟁, 생존, 성공이라는 자본주의의 써바이벌 형식을 통해 해소된다. 〈슈퍼스타K2〉에서 대중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이렇게나 깔끔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TV에는 있지만 우리 삶엔 없는 '기적'
그러나 그 가능성은 텔레비전에는 있으나 우리의 구체적 삶에는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 그것은 오직 서사로서만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는 자원의 고갈, 기후변화, 경쟁의 격화로 특징지어지는 위기의 시대이고, 이러한 위기의 주범은 민주주의를 앞세운 야만적 자본주의다. 모두에게 쾌락의 평등을 약속하며 그러니 경쟁하고 노력해서 이기라고 자본주의는 요구해왔지만, 모두가 '슈퍼스타'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너무나 분명하다.
대중 일반의 절망을 극소수의 기적 같은 성공으로 덮는 일이 영원할 수는 없다. 위기로 무너져가는 세상은 신화적 판타지가 감당할 수 없는 파국의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파국의 공포가 깊을수록 박진감 넘치는 써바이벌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은 더 강력해진다. 자본주의 공황기의 1930년대 헐리우드에서 대규모 판타지 영화가 양산됐던 것처럼 말이다. 〈슈퍼스타K2〉가 하는 일이 이것이다. "기적을 노래"함으로써 위기의 상황을 가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매트릭스 세계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슈퍼스타K2〉는 가장 황홀한, 그러나 가장 끔찍한 판타지다.
2010.10.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