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서로 이길 수 있는 게임을 하라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지금도 1976년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일본의 유명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끼의 대결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종격투기의 선조격이라고 할 이 경기는 기대와 달리 매우 싱겁게 끝났다. 이노끼는 링에 누운 채로 알리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으로 일관했고 알리는 이노끼가 일어나면 한방 날릴 자세만 취하는 지루한 상태가 15라운드 동안 지속되다 결국 무승부로 대결이 마무리되었다.
경기가 끝난 후 다리가 퉁퉁 부운 알리는 이노끼가 누워서 돈을 번다며 비난의 독설을 날렸다. 그러나 종목이 다른 두 사람이 정상적으로 게임을 펼칠 수 있는 규칙을 만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리 측의 요구로 프로레슬링의 주요 기술을 금지한 이면합의가 맺어진 내막을 보면 이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스탠딩 자세로 알리와 대적할 무기를 잃은 이노끼는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피하기 위해 누운 채로 싸우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후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노끼를 일방적으로 비난했으나, 그는 굴욕을 견디며 주어진 조건에 맞는 매우 적절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남북관계에 적합한 게임의 무대란
이처럼 게임에서는 참가자의 능력뿐 아니라 경기규칙과 환경이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면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무대를 선택하거나 만들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남북관계가 장기적으로 화해와 협력의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지만 여전히 여러 영역에서 경쟁적인 면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무대에서 경쟁할 것인가이다. 당연히 분단이라는 악조건에서도 우리가 쌓아온 성과를 계속 발전시키고, 한반도 민중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경쟁의 무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냉전기에는 군사적·이념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남북간 경쟁의 주요목표였다. 이러한 경쟁에서 남북이 치른 희생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지구적 차원에서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한반도에서 남북대화가 진전됨에 따라 군사대결구도가 완화되고 평화와 번영, 삶의 질 향상 같은 화두가 남북관계의 주요 측면으로 부각되었다. 이 경우는 결코 굴욕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경쟁무대에서 남한은 주도적 역할을 발휘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남북간 경쟁을 윈-윈 게임으로 만들어갈 여지를 넓혀왔다.
그러나 최근 남북의 경쟁무대는 빠른 속도로 군사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남북간에 몇차례 충돌이 반복되면서 남한 내에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하지 못하고 연평도 포격 같은 공격을 당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계산을 해도 군사대결은 결코 우리에게, 그리고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가는 데 유리한 경쟁무대라고 볼 수 없다.
군사경쟁은 공멸의 길
이는 군사적으로 남한이 북한에 비해 밀리기 때문은 아니다. 종합적인 군사력에서 남한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일 것이다. 전면전이 발발한다면 남한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승리라고 말하기 어려운 비극이라고 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해야 할 결과이다. 전면적으로 치닫지 않더라도 국지전이 반복될 경우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정치·경제·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함은 물론이고 남한이 점점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져들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번 사격훈련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는가? 자족적인 분풀이를 했을지는 모르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남북간 군사충돌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재연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분단체체하에서 남한은 어렵게 이룬 정치·경제적 성과조차 하나둘씩 사라지고 북한과 바닥을 향해 경쟁하는 길에 들어설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 경쟁은 장기적으로 남북 모두가 패배하는 길이지만 그중에서도 누가 잃는 것이 더 많을지는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잃을 것이 많은 남한 내에서도 군사적 긴장을 부채질하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남한 시민 사이에서 북의 모험주의적 행동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남한 시민은 결코 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추세가 강화되는 더 중요한 원인은 남한 내에 여전히 남북간 군사적 긴장을 통해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세력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북의 연평도 포격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음에도 국론의 단합을 추구하기보다 날치기 폭거를 통해 예산안은 물론이고 제대로 심의되지도 않은 법률안까지 통과시키는 행위에서 분단체제를 기득권 유지의 방패로 활용해온 냉전수구세력의 실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와 집권여당의 국론분열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이 군사긴장을 고조시키고 국론통합을 강조하고 나서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쟁무대의 이동이 필요하다
따라서 북한의 모험주의적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대비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남북간 긴장상태가 수구냉전세력에 이용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남과 북 각각에서 이러한 간섭요인들이 계속 작동하고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면 한반도는 물론이고 남한의 선진화도 요원해질 뿐 아니라, 높아진 긴장 속에서 언제라도 전쟁의 참화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을 맞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 빠르게 경쟁무대를 남한이 이룬 성과를 계속 발전시키고 한반도 민중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과제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 내에도 새로운 길을 원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을 우려하는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연평도에서의 사격훈련이 무력충돌을 확대시키지 않고 일단락되면서 긴장 속에서도 짧은 휴지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다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현 정부에는 임기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계속 막연한 북한붕괴론에 기대어 상황의 악화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의 무대를 바꾸기 위한 전략적 결단을 내리고 그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 시민도 상황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분단체제라는 질곡에 대한 인식을 가다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우선 이명박정부의 역주행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하며, 2012년 선거에서 이러한 역주행을 표로 심판하고 평화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시민의 힘이 뒷받침될 때만 분단체제를 활용해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을 극복하고 남북관계가 상생의 경쟁, 나아가 협력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2010.12.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