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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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교과서채택 비리를 넘어 공공문화의 강화로

김종엽 | 한신대 교수

고등학교 시절에 수학 공부를 하려고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을 샀었다. 수학 교과서가 있긴 했지만 지질도 나쁘고 내용도 고만고만한 게 풀어볼 문제도 적어서 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정석》을 사면서 그냥 《정석》을 교과서로 하면 될 텐데 뭣 하러 교과서를 따로 사라고 하는지 의아해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게 꽤나 구질구질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 중에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중 지난달 20일 서울지역 고교 교사 30명이 교과서채택 비리로 적발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악습이 여전할 뿐 아니라 더 고약해진 데도 있음을 알았다. 신문들은 교육은 뒷전이고 잿밥에 눈먼 교사들을 맹비난했는데, 그들이 질이 상당히 안 좋은 교사라는 것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수십년 동안 악습을 고칠 능력이 없었던 우리 사회의 무능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사실 현행제도를 뜯어보면 교과서채택 비리가 발생한다는 것이 좀 당혹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교과서는 몇종의 국정교과서를 제외하면 출판사들이 제작한 책을 검인정을 거쳐 교과서로 삼고, 일선 학교가 과목별로 10여종 쯤 되는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하나를 택해 자기 학교 교과서로 사용하게 되어 있다. 이런 검인정 체제 아래서 교과서 채택을 둘러싼 과당경쟁을 막기 위해 중-고교 검정교과서 발행조합에 가입한 출판사들은 전체 이익금의 60%를 균등 배분해왔으며, 7차 교육과정이 시행된 2000년부터는 아예 과목별로 이익금 전액을 균등 배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이 이렇게 사이좋게 '사회주의'를 하고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겉모양만 조금씩 달라져왔을 뿐인 오래된 악습이 개입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화 가운데 하나가 '수익자 부담 원칙'이다. 공적부문이 깡마른 나라라서 아쉬운 것이 있으면 뭐든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습속인 셈이다. 어린 학생들이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기보다 사서 보거나 그도 아니면 시내 대형서점에 가 자리잡고 주저앉아서 읽는 일이 다반사인 것만 보아도 그렇다.

교육은 특히 심하다. 사교육비는 물론이고 공교육도 말이 공교육이지 갖은 잡비를 내야 할 뿐 아니라 교과서조차 사서 봐야 한다. 국가도 이런 점은 미안했는지 언제나 학부모에게 부담이 덜 가도록 교과서 단가를 낮추려 해왔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과서도 4~5천원 남짓이다. 그간 지질과 인쇄상태는 좋아졌지만 이 때문에 책 두께가 얇고 내용이 부실한 것은 여전하다. 학습지와 자습서가 늘 추가로 필요한 것이다.

검인정 체제 하에서는 학교마다 교과서가 다를 수 있고, 그것에 연동해서 참고서와 자습서가 결정된다. 교과서의 몇배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이 참고서 시장이 교과서 제작의 진짜 목표가 된다. 그러니 출판사들이 참고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교과서를 충실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우스운 것은 이 시장에 모든 교과서 출판사들이 뛰어드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검인정 교과서 출판사들 가운데 교과서채택 로비를 하고 참고서 시장에서 경쟁할 능력이 없는 작은 회사는 아예 교과서 채택을 원하지 않는다. 검인정 교과서를 가진 것만으로 교과서 매출액보다 더 많은 이익을 균등 배분받는 것을 목표로 하며, 실제로 그것으로 만족이다. 그러나 규모가 큰 회사는 전력을 다해 채택률을 올려 참고서 시장을 장악하려고 한다. 이런 탓에 교과서채택 과정이 비리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교사가 30만이 넘는데 그들 중 일부가 평균적 도덕성 이하인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쎄팅된 제도는 은밀히 내사하면 언제나 잡아들일 수 있는 비리 교사를 양산할 것이다. 당연히 제도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건 단지 비리를 없애는 것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 교사의 비리 제거만을 목표로 한다면 채택 권한을 일선 교사의 손에서 떼내기만 하면 된다. 더 큰 문제는 교과서는 싸지만 알차지 못해 결국 참고서를 사야 하니 들 돈을 다 들이고 있다는 점과 검인정 제도를 통해서 교과서의 다양화가 이뤄졌지만 다양화가 교과서의 질적 향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채 우리는 수십년을 살아온 것이다.

문제 해결의 방향은 우리 사회가 결국 들이고 있는 돈을 제대로 된 교과서를 만드는 데에 제대로 쓰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어쨌거나 비싸진 교과서가 가난한 가정에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니 그럴 때는 당연히 교과서를 무상공급 해야 한다. 그러면 이번엔 국가의 재정부담이 커지게 되는데, 세금 늘리는 게 걱정이 된다. 늘 뺑뺑 도는 문제인데, 필자가 지난 1년간 머물며 목격한 캐나다의 사례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는데 참고할 만하다.

캐나다 공립학교는 한권의 교과서를 7년간 사용한다. 교과서를 장정이 잘된 훌륭한 책으로 만드는 대신 그 책을 학생이 소유하게 하지 않는다. 학생은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것처럼 일년간 쓰고 반납해야 하며 책에 줄을 긋는 등의 사소한 손상도 금지된다. 이런 방식의 교과서 정책은 필자가 보기에 3중의 장점이 있다. 우선 앞서 말했듯이 돈을 더 들여 좋은 교과서를 만들어도 재정부담이 거의 늘어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학생들에게 공공의 자산을 사용하고 존중하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만들기 위해 베어야 하는 나무가 줄어드니 환경보호에도 기여한다.

우리 사회는 빈약한 공공부문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의료도 그렇고 주택도 그렇다. 쓸 돈 다 쓰면서 고통을 받고 있다. 사교육에 쓰는 돈만 해도 20조에 육박한다고 추정된다. 그런데 이 돈을 공적부문으로 흘러들어오게 할 방안을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교과서 정도의 일이라면 우리 사회가 해결 능력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수익자 부담 원리가 만들어낸 온갖 너저분한 양상을 공공재정을 통해서, 그리고 교과서를 공유하는 공적문화를 통해서 떨쳐 내는 '수로' 정도를 마련하는 것은 지혜를 모으면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도 못한다면 방대한 사교육비를 공교육 재정으로 이끌어들이는 '운하'를 파는 방안을 찾는 일 같은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울 것이다.

사족: '운하'라고 적고 보니 대선주자인 이명박씨가 주창하는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황당한 운하가 아니라 이런 제도의 운하부터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6.12.05 ⓒ 김종엽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