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민주화 시민혁명과 중동의 새 질서
서정민 /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과 교수
"수천년 동안 발생하지 않았던 일을 이제 일구어내고 있다. 이 흐름은 모든 아랍 및 이슬람권으로 이어질 것이다." 중동의 정치 강국 이집트의 후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이 발표된 3월 12일 카이로아메리칸대학 정치학과 왈리드 카지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레바논 출신으로 이집트에서 20여년 교수직을 지낸 카지하 교수는 "아랍 및 이슬람 역사의 전환점을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카지하 교수의 예측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화 시민혁명의 물결은 이집트와 튀니지의 황량한 사막을 넘어 많은 아랍국가로 밀려가고 있다. 당장 리비아와 예멘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 '버티기' 전술을 취하고 있지만 카다피와 살리흐 정권의 형편도 풍전등화다. 시민혁명의 높은 파도는 다른 아랍국가로도 넘쳐 흘러들어가고 있다. 알제리, 바레인, 모로코, 팔레스타인, 요르단, 수단 등에서도 개혁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오일머니 기반 왕정도 무너질 것
이번 아랍권 민주화 열풍은 단지 독재 타도라는 정치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사상혁명이다. 아랍인은 물론 더 나아가 제3세계 권위주의 체제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구조(mentality)를 바꿔놓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리더가 없는 혁명’을 성공시켜나가고 있다. 정보통신 수단을 한손에 쥔 개인들이 모여 정권을 교체하는 '새로운 틀의 21세기 혁명'이다. 과거처럼 권위주의에 도전하기 위해 조직력과 물리력을 갖춰 장기간 준비하고 대치해야 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이번 민주화혁명이 중장기적으로 산유국 왕정체제에까지 확산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우선 헌법을 가진 공화정 독재정권이 붕괴할 것이다. 이미 몰락한 튀니지와 이집트, 그리고 현재 위기에 처한 리비아와 예멘 모두 공화정이다. 연일 시위가 진행중인 알제리, 이라크 등 다른 공화정도 불안에 휩싸여 있다. 두번째 변화의 바람은 입헌군주국으로 불 것이다. 이미 바레인에는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소수 수니파 왕정의 퇴진을 요구하며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다른 입헌군주국 모로코와 요르단에서도 시민들은 포괄적인 정치개혁이 없을 경우 체제에 도전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절대세습왕정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주로 걸프 산유국이 주축인 이들 왕정국가의 경우도 오일머니로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임에 틀림없다. 왕족이 모든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고 있어 많은 시민들은 비록 먹고살 만하더라도 상대적 박탈감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사우디 등 대부분 왕정국가가 이를 막거나 늦추기 위해 대대적인 복지 확대와 개혁조치를 현재 선제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왕정의 몰락을 부추기는 변수가 리비아 사태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유의해 지켜볼 필요가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민혁명은 큰 틀에서 민주화 요구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리비아의 상황은 부족간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부족주의가 리비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걸프지역 아랍권 왕정에서도 부족주의는 통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국명의 사우디는 최대 부족의 가장 강력한 가문의 이름인 '사우드'에서 나왔다. 이 사우드 가문이 왕족을 구성하고 대부분 정부 요직은 물론 유전의 관리 및 주요 경제활동을 사실상 독식하고 있다.
사우디만이 아니다. 소위 왕정이라 불리는 걸프국가에서는 가문의 수장이 절대군주이자 세습군주로서 군림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는 나흐얀 가문, 두바이는 마크툼 가문, 카타르는 싸니 가문, 쿠웨이트는 사바흐 가문이 왕위는 물론 정부 요직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집권할뿐더러, 쿠웨이트를 제외하곤 실질적인 선거제도도 없다.
이미 변화하기 시작한 중동의 정치역학
여러 정권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의 정세도 장기적으로 요동칠 것이다. 중단기적으로는 아랍 최대의 정치 강국인 이집트의 공백이 아랍정세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서방의 대중동 전략에도 큰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우선 답보상태에 있긴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서 미국과 서방의 입장을 상당부분 대변하면서 중재자를 자처해온 이집트의 역할을 당분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가장 먼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팔레스타인 저항단체 하마스의 무력투쟁에 반대해왔던 이집트의 군부가 약화되면서 미국이 중시하던 이스라엘의 안보에 적지 않은 악영향이 예상된다. 더불어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전면에 나섰던 무바라크의 모습도 한동안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권을 '악마화'하는 미국 내 강경보수파에게는 큰 충격이다.
이보다 미국과 서방이 더 우려하는 것은 이란의 부상이다. 미국의 대중동 전략에서 양대축은 이집트와 사우디다. 그런데 사우디와 더불어 수니파 이슬람의 주축인 이집트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이라크전쟁 이후 확대되고 있는 시아파 초승달의 주축 국가인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게 될 것이다.
이란을 축으로 서쪽으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그리고 남쪽으로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까지 연결되는 초승달 모양의 시아파 블록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란은 이미 현재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국의 패권을 과시하려 하고 있다. 이란은 3월 14일 터키와 9년 만에 정상회담을 갖고 중동지역 내에서 양국간 협력을 다졌다. 또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최초로 이란 군함 두 척이 2월 23일 수에즈운하를 통과했다. 군사적인 활동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시리아와 해상합동훈련도 펼칠 예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후 발생할 중동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다양화와 다원화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다양한 정치체제가 등장할 것이다. 정권이 바뀐 나라는 물론 당장은 위기에 처하지 않은 산유국도 적지 않은 변신의 노력을 거듭할 것이다. 나라마다 다른 정치체제 및 민주화의 정도가 나타날 것이고, 경제정책 또한 각국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더불어 한 국가 내에서도 다원화된 의사결정구조가 마련될 것이다. 과거 군부독재 최고 엘리뜨 혹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이 결정하던 사안들이 의회, 시민사회, 이익단체 등에 의해 감시와 견제를 받을 것이다.
다양성과 다원성이 커진다는 것은 무력으로 이념을 강요하는 권위주의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번 중동의 시민혁명은 그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북한, 쿠바, 중국 등 지구상에 남아 있는 권위주의적 통치 및 이념체계에 도전하는 풀뿌리 봉기가 본격화할 것임을 예고한다. 더불어 자본과 군사력으로 약소국의 '맹목적 추종'을 강요하는 서방의 패권주의에도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2011.3.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