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한·EU FTA
남희섭 / 변리사
지난 5월 4일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국회를 통과하던 그 시각 필자는 국회 본관 중앙홀에 있었다. 반대의사를 본회의 참석 거부로 표명하겠다는 민주당 의원들은 건너편 모니터를 통해 표결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열명도 채 안되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의원들이 힘겹게 반대토론을 이어갔다. 발언시간 5분이 지나도 반대토론이 계속되자 한나라당 의원들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쇼 한다" "세상 물정 모른다" "추하다" 따위의 조롱을 퍼부었다. 마이크가 꺼져 토론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의 고함은 모니터의 스피커를 타고 계속 흘러나왔다. 몇명 되지도 않는 반대 의원들의 토론조차 더이상 견디지 어려웠던지, 김무성 의원이 토론종결 동의안을 냈고, 그대로 비준동의안 표결절차로 넘어갔다.
1명의 반대와 163명의 찬성. 한미 FTA보다 관세 철폐의 폭이 더 크고, 써비스 개방 분야도 많으며 우리 밥상과 직결된 농업을 초토화할 한-EU FTA는 이렇게 국회를 통과했다. 한-EU FTA가 가서명된 것이 2009년 10월이니 1년 반만의 싸움이 이렇게 싱겁게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끝이 아니다. 한 단락이 지나가고 새로운 전장이 펼쳐질 것이다. 앞으로 해야 할 싸움은 더 치열하고 끈질긴 투쟁을 요구한다. 바로 앞에 한미 FTA가 놓여 있다. 이보다 더 지리한 싸움은 이들 FTA를 시행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요구된다.
부실한 사회적 합의 감추는 '정책세탁'
그간의 한-EU FTA 논의는 한마디로 세탁의 과정이었다. 돈의 출처와 흐름을 숨기기 위한 자금세탁처럼, 정책의 입안자와 사회적 논의를 덮기 위한 이른바 '정책세탁'(policy laundering)이었던 것이다. 유럽연합(EU) 같은 거대 경제권과 강도 높은 포괄적인 FTA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뜻이다. 이 정책은 공적 규제를 최대한 없애고 거대자본의 이윤공간은 확대하면서, 반대로 복지공간은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의미한다. 만약 이런 구조조정을 FTA를 통하지 않고 내부 논의만으로 달성하려면, 1년 반이 아니라 수십년의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FTA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 '거대시장 선점' 같은 구호성 홍보만으로도 사회적 합의과정을 비켜갈 수 있게 한다. 본회의장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에게 조롱을 퍼부었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던지는 찬성표가 수출을 늘리고 그래서 우리 경제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자신의 결정을 쉽게 합리화할 수 있다. 한-EU FTA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 제대로 검토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기가 막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EU FTA 협정문을 한번이라도 다 읽어본 국회의원은 단 한명도 없는 듯하다.
'선진국과의 합의'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명목으로 포장되어 내부논의가 생략된 FTA에서 민주적 합의과정을 조금이라도 복원하려면 ‘통상절차법’의 제정이 시급하다. 그동안 통상절차법은 통상협정을 체결하는 데만 주목했는데, 그뿐 아니라 이행과 평가는 물론 개정과 폐기의 과정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한-EU FTA만 하더라도 협정 발효 후 수많은 국내 제도를 FTA가 명령하는 대로 재편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을 통상관료들이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EU FTA에 따르면, 통상교섭본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무역위원회가 설치되고 그 산하에 협정의 이행·감독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전문위원회와 작업반이 꾸려진다. 무역위원회는 협정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한 결정권한이 있고, 이 결정은 협정 당사국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구속한다. 무역위원회는 협정에서 특별히 규정한 경우 협정문을 개정할 수 있고, 협정에 대한 해석 권한마저 가진다. 앞으로 한-EU FTA와 관련된 사안에서 한국의 통상관료들은 유럽연합의 통상관료들과 합의하기만 하면, 국내 어디에서도 통용되는 조커 카드를 쥐게 되는 셈이다.
무상급식과 중소상인 생존권에 미치는 영향
이것이 불러올 결과는 분명하다. 통상관료들은 거대 기업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옹호할 수 있으며, 중소상인이나 농민 및 서민은 실효성 없는 피해대책으로 회유하면 그만이다. 두가지 예만 들어보자.
지난 재보궐선거 때 야4당 정책합의문에는 '초중등학교 무상급식 확대실시'가 들어 있었고, 얼마 전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김상곤 경기교육감은 무상급식을 유치원과 중학교 전체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친환경 무상급식 확대는 한-EU FTA를 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유럽연합과 달리 한국은 FTA 협정문에 학교급식을 예외로 두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무상급식에서 우리 농산물을 우선 구매하면 당장 협정 위반의 문제가 생긴다.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작년말 여야가 어렵게 합의했던 유통법, 상생법도 같은 운명이다. 유통법은 전통상업보존구역 500미터 이내에 대규모 점포의 입점을 시장·군수·구청장이 제한할 수 있도록 했고, 상생법은 대기업이 소매점포를 직영하거나 체인사업 형태로 운영하는 경우 중소기업의 경영 안정을 위한 사업조정을 중소기업청장이 권고 또는 명령하도록 했다. 그런데 한-EU FTA의 '써비스 양허표'에는 이를 유럽연합 기업들에는 적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장 국내 대형 유통사들은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문제 삼을 것이고, 유럽 기업들과 합작투자를 통해 유통법, 상생법을 무력화할 것이다.
민주당, '잠정 발효 유예조치'에 앞장서야
이를 해결하려면 유럽연합과 다시 협상해야 하는데, 그전에 7월 1일 잠정발효일에 관련 조항의 효력을 유보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다른 FTA와 달리 한-EU FTA는 정식 발효와는 별도로 잠정 발효에 관한 조항을 두고 있는데, 이는 일부 조항들의 발효를 유예하기 위한 것이다. 발효가 유예되는 조항은 한쪽 당사국이 임의로 선정하여 통보하면 그만이고, 이에 따라 유럽 이사회는 이미 17개 조항을 잠정 발효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한 바 있다.
친환경 무상급식과 중소상인을 위한 잠정 발효 유예조치 정도는 민주당이 앞장서 관철해야 한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민주당은 4·27 선거의 야4당 정책합의 파기에 대해 사과할 명분이라도 생길 것이다. 선거를 앞둔 야권연대가 단순히 어느 지역구에 누구를 후보로 내보낼지 정하기 위한 협상용이 아니라, 진보의 가치를 구현할 지속적인 정책에 관한 합의가 되려면 앞으로 한-EU FTA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실천적 고민이 야권연대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2011.5.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