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과연 20대는 보수화되었나
허지웅 / 칼럼니스트
길거리 주정뱅이조차 그 하찮음의 수준을 참을 수 없어 입에 올리지 않을 말 따위가 공론화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최근에 나온 'P세대'라는 용어와 그에 따른 논란이 바로 그렇다. P세대라는 단어 자체는 과거 광고장이들이 먼저 만들어낸 말이다. 당시의 P세대는 Participation(참여) Passion(열정) Power(힘)라는 키워드로부터 끌어낸 것이었다. 세대에 이름 붙이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뭔가 팔아먹으려면 그런 기민함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최근 느닷없이 등장한 '천안함 P세대'는 이와 또 다르다. 중앙일보는 '천안함 P세대'라는 말을 설명해내기 위해 Patriotism(애국심) Pleasant(유쾌한) Power n Peace(힘과 평화) Pragmatism(실용주의) Personality(개성) Pioneer(개척자)라는 키워드를 꼽았다. "P세대는 천안함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실체를 인식하고 애국심을 발휘하고 있는 20대 젊은층"이라 설명하고 있다.
천안함 P세대는 누구?
P로 시작하는 그럴싸한 단어는 전부 가져다 붙일 기세라 논바닥에 자라는 피는 왜 뽑아다 쓰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인데 아무튼 촌스럽고 무의미한 일이다. 현상을 배반하고 실제 존재하지 않는 집단을 만들어내 자신의 이해관계에 종사하는 상징 구호로 써먹는 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꼰대들의 낡은 전략이다. 개중에는 해석에 동원되는 일종의 프레임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어찌됐든 이런 게 화제가 될 수 있다는 건 여러모로 놀라운 노릇이다. 오마이뉴스가 중앙일보의 기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뉴데일리나 독립신문 같은 매체가 들러붙으면서 소모적인 공방이 오고 갔던 모양이다.
중앙일보는 이 '천안함 P세대'에 관련해 매우 다양한 형식의 연속 기사와 칼럼을 내보냈다. 그중에 '천안함 P세대'의 실체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사진이 있는데, 4월 2일자 '북한인권 전시회에 북적이는 천안함 P세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사진 가운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남자를 제외하고 단 세 사람이 '북적이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나마 한명은 아주머니다. 이 신문은 한국대학생포럼 등 자신의 논지를 받쳐줄 만한 단체의 규모를 뻥튀기하거나 대단한 변화가 있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했다. 이와 유사한 상품으로 동아일보의 '신안보세대'가 있다. 육군, 공군 등의 1월 모집병 지원율을 근거로 천안함 이후 20대 안보의식이 강화되었다며 제시한 개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1월에는 지원율이 높다.
기대하는 보수, 걱정하는 진보
천안함 P세대든 신안보세대든 소위 '세대적 경향'으로 인정하기에는 유의미한 통계와 사례가 극단적으로 빈약하다. 젊은층의 투표율 상승이 두드러졌던 4.27 재보선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수화된 젊은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세대적 경향으로 포장하는 건 무리수다. 젊은 세대와 좀체 소통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자위용 가상현실을 제공하는 건 제 마음이지만 아무래도 종이 낭비라는 생각이다.
다만 천안함 P세대나 신안보세대론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심지어 논쟁이 될 수 있는 인식의 배경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여기에는 〈88만원 세대〉 이후 점쳐진 '20대 보수화'를 겨냥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 20대가 보수화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보수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만 혹시 모를 걱정에 사로잡힌 진보의 표정이 겹쳐 있는 것이다.
20대는 전통적으로 투표를 잘 하지 않는 세대다. 이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와 노력에는 보수든 진보든 어딘가 눈물겨운 데가 있다. 요즘에는 반값 등록금을 둘러싸고 판이 벌어져 시끄럽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곱게 들리지는 않는다. 사회 진출을 앞둔 20대를 응원하고 축복해줘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씨스템이다. 한국은 20대를 정신병에 걸리게 만드는 나라다. 이런 왜곡된 씨스템을 용인하고 그 일부로 수십년을 살아온 기성세대는 적어도 "투표하지 않는 너희들 탓" 따위의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20대가 스스로의 살 길을 도모하기 위해 진보적인 행보를 보이든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든 그에 대해 개념이 있네 없네 떠들 자유는 더욱 없다.
근거 빈약한 20대 보수화론
어쨌든 20대는 과연 보수화되었나.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의 우경화 경향을 들어 20대가 보수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확실히 이글루스나 디씨 같은 커뮤니티 공간은 전과 비교해볼 때 담론 형성의 축이 보수성향의 유저들에게 완연히 넘어갔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이들 커뮤니티 써비스를 사용하는 보수성향 유저들 가운데 20대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입자수가 100만이 채 되지 않는 이글루스 같은 블로그 써비스의 경향을 들어 전체 20대가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물론 가능하지 않다.
상수동에 사는 사람들을 상수동 주민이라는 말로 싸잡아 그들을 둘러싼 팩트를 인식하는 건 가능하지만, 상수동 주민이라는 말이 상수동에 사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20대 문제'라는 단어를 동원해 그들의 불비한 여건과 상황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파편화된 몇가지 사례를 들어 세대 전체를 싸잡아 그 절대 다수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의 20대가 과중한 비용과 과잉경쟁을 강요받으며 체념의 정서를 어느정도 공유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20대가 시퍼런 물이 들어 자유기업원 식의 경쟁만능주의를 찬양한다고 인식하는 건 부당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식의 '20대 개새끼론'은 유독 진보진영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주 소비되는데, 비관을 위한 비관으로서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내놓아야 자기 존재이유를 증명할 수 있는 이같은 사람들은 20대보다 스스로를 먼저 연민하는 게 나을 것이다.
20대도 마찬가지다. '20대 문제'라는 말이 그들의 모든 문제를 포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젊은 세대에도 똑같은 질량의 성찰을 요구한다. 명문대 중산층 학생들 위주의 '88만원세대' 운동은 일시적인 연민을 얻을 순 있어도 현실에서 동력을 얻기에는 부족하다. 이제는 비정규직 문제, 학자금 문제, 주거 문제 등에 노출된 20대 당사자들이 세대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인정해야 할 단계다. 이를테면 20대 비정규직은 단위별 30, 40대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적으로 세력화되어야 한다. 지난 재보선 결과에서 젊은층의 투표 참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드러났듯, 이는 한국사회에 무시하지 못할 가능성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2011.6.1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