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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교육과정과 교과부의 야심

김진경 / 시인,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이주호 장관이 이끄는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교과 축소, 교과집중이수제 등을 주요 이유로 내세워 급작스럽게 교육과정의 전면 개편을 추진해왔다. 2007년에 이루어진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교과서들이 이제야 만들어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2009년의 교육과정 개편은 이미 교육현장에서 반박해온 것처럼 너무 빨랐다. 새 교육과정이 현장에서 실행되고 피드백도 되기 전에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개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 갑작스럽게 교과별 교육과정 각론 마련 등을 빌미로 또다시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해 2011년 교육과정을 8월말에 고시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2012년 3,4월까지 새 교과서를 내놓으라는 것은 무슨 졸속으로 벌이는 토목공사도 아니고 어불성설이다. 교과별 공청회에서 우려가 쏟아지고 각 교과 교사모임에서는 성명을 발표하고 교과서 발행사와 저작자들도 몰아치기식 개정을 반대하는 의견 광고를 내고 있는 이런 상황에도 교과부는 요지부동이다.

 

졸속 교육과정 개편이 일으킨 난리

 

교과부는 우리나라의 교육과정 제도가 수시개정으로 바뀌었음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교육과정 수시개정의 기본 취지는 사회변화의 속도가 빠른 만큼 그 변화를 수시로 반영할 수 있도록 열어두자는 것이다. 즉 교육과정의 전면개편을 멋대로 자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부분 수정을 할 수 있도록 열어두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주호 장관의 교과부는 교육과정 개편을 왜 이렇게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일까? 좋게 봐주면 정책적 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주호 교과부는 고등학교 단위이수제의 명칭을 학점제로 바꿔 그 원래 취지를 명료화하고 교육현장에 정착시키려는 일말의 야심이 있는 듯싶다. 그 연장선에서 교과 축소나 교과집중이수제(특정 교과를 특정 학기에 몰아서 이수하는 제도) 등을 들고 나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단위이수제의 원래 취지는 낙제를 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빼면 대학의 학점제와 똑같은 것이다. 즉 학생들이 학년이나 반 없이 자유롭게 수강신청을 해서 수업을 듣고 정해진 단위를 이수하면 졸업하는 미국 고등학교와 비슷하다. 고등학교가 이러한 모습으로 바뀌면 획일적 대학입시 경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학교의 입시학원화 거드는 교과부 개편안

 

이 단위이수제는 박정희정권 시절에 도입되어 반세기가 지났건만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의 모습은 원래 취지와 거리가 멀다. 교육정책에 결정력을 가진 상층관료들은 미국식 교육과정을 도입만 해놓고 50년 동안 그게 학교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관심도 없었고,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의지도 배짱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은 어둠속에 숨어 있다가 이른바 장학지도니 감사니 하는 귀찮은 절차 때나 이빨을 드러내고 나타나는 좀비나 강시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이 좀비는 피 대신 종이를 먹는 놈이어서 쓸데없는 가짜 서류만 잔뜩 빨아먹고 사라진다.

 
이렇게 교육과정이 무책임하게 방치되는 동안 학교현장의 교육과정을 실제로 움직인 것은 대학입시다.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대학입시와 무관한 과목들이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다른 수업으로 대체되거나 자습시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교과부가 내놓은 교과목 축소와 교과집중이수제는 그 의도와는 다르게 공공연한 비밀을 제도화하여 학교의 입시학원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미국의 중등교육에서는 예체능활동이나 사회활동이 교과로서보다 써클활동으로 활성화되어 있고 대학입학에 필수적으로 반영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입시중압 속에서 그와 관련되지 않는 이상 예체능 써클활동은커녕 예체능교과조차 허구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과목 축소를 이유로 예체능교과를 약화시키면 학원과 다르게 전인교육을 추구한다는 학교의 변별적 특성은 사실상 사라지는 것이다. 교과집중이수제 역시 마찬가지다. 단위제가 제대로 시행되어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이 학점제의 대학처럼 운용된다면 교과집중이수제가 효율적일 것이다. 하지만 대학입시가 실질적으로 현장의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대학입시를 위한 교육과정의 편법 운영을 제도화해주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선결과제 해결 없이 정권 입맛만 맞추려나

 

사정이 이렇다면 교육과정 개편에 앞서 제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학점제를 실질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예산 계획과 확보 방안, 강력한 저항들을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통해 풀어가며 실현해갈지 하는 로드맵과 그에 필요한 씨스템이다. 단위이수제가 허구화된 데는 사실 예산 문제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에 필요한 시설과 다양한 인력의 배치 등에 들어가는 예산은 4대강사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막대할 것이다. 이러한 예산을 재벌 등 경제계의 저항, 예산편성권을 쥐고 있는 경제관료의 견제를 뚫고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단위이수제의 실질적인 정착은 교직사회의 전면적 개편을 가져오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저항이 클 수밖에 없다. 반세기 동안 진전을 가로막아온 요인이다. 고등학교 학점제의 실질적 정착을 위한 위와 같은 선결조건들을 해결할 책임있는 대안 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교육과정 개편부터 졸속으로 들고 나오는 것은 정책의 진실성을 의심케 할 뿐이다.

 

이번 교육과정 개편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만한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전경련 등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경제와 관련한 시민사회의 역할과 노동의 가치에 대한 내용을 줄이거나 삭제한다든지, 국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과목은 시수(時數)를 줄이면서 영어시간은 늘린다든지, 현대사 기술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역사서술 체계를 바꾸는 등 정권의 입맛에 맞게 변경하는 내용들이다. 정권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위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교육과정 개편을 한 것은 정당성이 결여된 역대 군사독재정권의 악습이었다. 이 악습이 민주화시대에 반복되는 걸 보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게다가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 그럴 듯한 정책적 야심을 내세우는 걸 보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차라리 쓸데없는 위장은 걷어치우고 솔직하게 정권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부분만 개정하겠다고 하라. 그게 오히려 정직한 태도다.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들의 작태는 여야를 불문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국회 상임위원들이 우선적으로 파악할 것은 이번 교육과정 개편이 어떤 큰 교육정책의 일환인지이고, 중요하게 판단해야 할 것은 재정 여건상 그 큰 교육정책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여부다. 실현 불가능하다면 어째서 불가능한 안을 밀어붙여 불필요한 혼란과 낭비를 가져오려 하는가를 따져야 하고, 실현 가능하다고 본다면 구체적인 재정확보 원칙이 무엇인가 등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 아울러 짚어야 할 부분은 정권이 자기 편의대로 교육과정을 좌지우지하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여당 의원은 할 일은 안하고 엉뚱하게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제작을 독촉하여 7개월 만에 완성된 교과서를 내놓도록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고, 야당 의원은 꿀 먹은 벙어리니, 참 소가 웃을 일이다.

 

2011.7.2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