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이명박정부, ‘판을 살리는 외교’ 해야
문정인 / 연세대 교수
지난 7월 이후 한반도 정세는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아세안안보협력포럼(ARF)을 통해 남북 6자회담 대표 회동과 남북 외무장관 비공식 접촉이 이루어졌고, 바로 뒤이어 북한 외무성 김계관 제1부상이 전격적으로 미국을 방문해 스티븐 보즈워스 특사와 양자 접촉을 갖기도 했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물꼬가 동시에 열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나온 배경이었다. 이명박정부 또한 5·24 대북경제봉쇄 조치를 다소 완화해 인도적 지원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등 북한과의 관계개선 노력을 보였다. 이 때문에 이대통령의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 거는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지만 변화하는 한반도 정세에 부응하는 유연한 메씨지가 이번 경축사에 담길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그러나 2009년의 '신(新) 평화구상'이나 2010년의 '통일세 제안'과 비교해볼 때 이명박 대통령의 이번 광복절 경축사는 지극히 담백한 원론 수준의 대북 메씨지를 담는 데 그쳤다. 이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통일은 겨레의 소원"이자 "광복의 완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결의 시대'를 뛰어넘어 '평화와 협력의 시대'를 열자고 호소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책임있는 행동과 진정한 자세로 상호신뢰를 구축"하고 '평화협력과 번영의 길'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원론에 그친 MB의 8·15 대북 메씨지
이대통령으로서는 이번 경축사가 재임중 평양에 의미있는 메씨지를 보낼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경축사가 원론 수준의 발언에 그치고 만 이유는 무엇일까. 두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이미 한국이 제안한 '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 재개'라는 프로쎄스가 진행중이므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상황 판단에 따른 것일 수 있다. 더욱이 남북정상회담 카드 같은 큰 구상이 알려진 마당에 새삼 다른 카드를 꺼낸다는 게 어색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제안을 한다 해도 평양이 이를 정면 거부할 경우 더 큰 낭패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자면 이번 경축사의 원론적 언급은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이 전혀 바뀌지 않았음을 재확인해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지난 3년간 정부는 상생, 신뢰구축, 평화협력,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대북 압박정책을 전개해왔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 역시 이러한 기존 정책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는다. 북한을 공개적으로 자극하지는 않겠지만, ‘원칙있는 대화’라는 기조를 양보할 의사는 없음을 천명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원칙있는 남북대화' 고수하는 사이 급물살 타는 북미관계
두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게 옳든 간에, 이는 현 정부의 운신 폭이 그만큼 좁다는 것을 암시한다. 7월 김계관 방미 이후의 북미관계 구도만 살펴봐도 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뢰할 수 있는 미국측 소식통에 따르면, 방미 기간에 김계관은 주요 사안에 대한 북한측 입장을 비교적 솔직하게 워싱턴에 개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과의 조건 없는 대화 재개와 관계개선을 무엇보다 강력히 희망하고 있으며, 김일성의 유훈에 따라 핵무기를 포기할 용의가 있음을 명백히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미국 역시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거두고 관계정상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입장도 함께 전달했다고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북측이 협상을 단순화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북미간 최고위급 당국자 회담, 즉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소식통의 말을 좀더 인용하자면, 김계관은 미국이 대북제재를 완화하고 식량원조를 재개하면 추가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발사의 모라토리엄(활동 중단)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다만 농축 우라늄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고 하는데, 즉 북한도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고 그 일환으로 우라늄 농축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미국이 과거에 약속했던 경수로를 공급해준다면 이를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다. "같은 말(same horse)을 두번 사지 않겠다"는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 등 미국측 인사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미국이) 한번도 우리에게서 말을 산 적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같은 말을 두번 팔 수 있나"라고 반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이러한 요구에 미국측이 쉽게 응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그간 취해온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화모드로 정책을 선회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0만명이나 되는 재미동포 이산가족의 재상봉에 대해 북미 양측이 합의한 것이나, 그간 중단됐던 북한내 미군 유해 발굴사업이 재개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를 방증한다. 의회 변수가 남아 있긴 하지만 미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도 곧 다시 추진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속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 북미대화 재개 자체는 이제 기정사실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북미대화 길 터주고 자기 발은 묶으려나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정부의 입장은 앞으로 매우 난처해질 수도 있다. 발리에서의 남북접촉을 통해 북미대화의 물꼬를 열어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북미관계가 개선되는 동안 남북관계가 정체상태를 면치 못한다면 한국이 스스로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자초한 형국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발상 전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천안함·연평도 문제와 그로 인한 국내정치적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남북관계 활성화를 위해 전향적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통미봉남을 차단하고 5자공조를 복원해 북한을 압박한다'는 그간의 방어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6자회담 재개와 북한의 비핵화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명박정부가 택해야 할 것은 '판을 깨는 외교'가 아니라 '판을 살리는 외교'이고, 선택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2011.8.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