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젊은이를 살리자
최원식 |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2006년이 저문다. 바야흐로 성찰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동트는 기상도 장하지만 황혼은 황혼대로 웅숭깊어 사람과 만물이 함께 그리고 각각 자기본질로 회귀하는 드문 기회가 되기도 하거니와, 이 귀한 시간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소란 속에 2006년이 제대로 저물지를 못하니 딱한 일이다. 올해는 공교롭게 애동지다. 애동지 든 해는 나라에 근심이 많다는데 2007년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대통령의 발언으로 가뜩이나 팥죽 끓듯 하는 정치권이 소연(騷然)하다. 나라 권력의 향방을 놓고 벌써부터 ‘진흙밭의 싸움개’ 형국을 짓고 있는 판에,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 선거는 왜 그리 자주 닥치는지, 세종임금을 복제할 수 있다면 하는 엉뚱한 공상에 우세스럽다. 현 정치판이 오작동을 그치지 않으니 지역주의가 야금야금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더니만 급기야 이제는 아니 보리라 여겼던 옛 대통령과 구정객이 회동하는가 하면, 전 낙선자까지 이순신장군의 비장한 어록을 방패로 나서니 우리 장군님이 참으로 불쌍타.
죽은 혼들을 하나하나 불러세우는 최근 정치판의 난맥을 보건대, 특히 여당과 청와대의 엄숙한 자기성찰이 그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권력투쟁적 쟁론을 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어떤 위기를 염두에 둘 때 결코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요즘 한국사회는 예전의 활력을 잃었다. 체감경기의 냉기도 일정하게 작용했겠지만, 꼭 경제에만 돌릴 일은 아니다. 안으로 고요히 정제(整齊)되어가는 품이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던 ‘잃어버린 10년’ 시대의 일본사회를 보는 듯한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우리 젊은이들의 진로선택의 세태가 그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 이후 유구한 전통으로 된 법대·의대 바람이 요즘은 더욱 심해졌다. 의대의 경우, 이제는 한의대와 수의대까지 합쳐 온통 법석이다. 그럼에도 정작 서양의학의 꽃이랄 일반외과는 3D업종으로 몰려 내리막이고 기초의학 분야 특히 해부학은 지원자 기근이 심각한 반면, 외모중시 세태를 딛고 성형외과가 문전성시고 애완동물 붐을 타고 수의사가 인기직종으로 부상하였다.
이과 인재들을 방대한 의대군(群)이 독점해버린 셈인데, 문과 인재들은 법대가 다 거두어간다. 이제는 비법대생들도 사법시험을 비롯한 각종 고시에 매달리고 있어, 마침내 전대학의 법대화라는 위업 달성을 목전에 둔 형국이다. 이에 더하여 사대·교대 바람이 새로이 불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교단에 몰리는 현상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위해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거의 열풍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이 풍조의 내면에는 안정의 희구라는 현실주의도 복재(伏在)하고 있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왜 우리 젊은이들이 패기를 잃었을까? 창조적 도전보다는 직업적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 도저한 현실주의를 질타하는 것은 그를 해결할 현실적 길이 아니다. 청년실업 문제에 깊은 책임을 자각해야 할 자는 기성세대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젊은이들을 그 세대의 명예로운 자부심의 핵심인 창발적 모험의 길을 회피하고 차가운 안전망으로 투신하게 부추기는가?
아무래도 한국사회의 유연성이 현저히 떨어진 것과 무관한 듯싶지 않다.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그동안 한국사회는 교육을 매개로 한 신분이동의 가능성이 비교적 열려 있는 폭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특히 IMF사태를 고비로 중간층이 하향분해되면서 이랑과 고랑의 분할이 고착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회탄력성의 저하가 오히려 민주화 이후 심화된 역설이 흥미롭다.
사회적 유연성의 결과로서 성립한 민주화가 거꾸로 그 모태를 갉아먹는 반어적 상황을 곰곰이 살피건대, 핵심은 개발독재 모형을 제대로 극복하여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사회모형을 광범한 토론 속에 구축하지 못한 집합적 나태에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 지체와 간극 속에 과거의 망령들이 백주에 출몰하여 살아 있는 영혼과 육체를 푸닥거리한다. 단돈 백만원 들고 재벌로 뛰어오르는 보나빠르뜨의 시대가 어느 틈에 끝났음을 온몸으로 눈치챈 젊은이들은 절망으로 삭힌 분노 속에 현실주의로 탈주한 것이다.
청년의 현실주의는 한 사회의 미래를 박탈하는 독이다. 노인이 지배하던 왕조시대에도 젊은 선비의 원기를 소중히 배려했음을 상기할 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청년의 침묵하는 분노가 찬 체념으로 전락하기 전에 그들의 창조적 도전이 꽃피울 수 있는 전반적 사회개혁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팥죽을 먹이지 않는 애동지가 올해 든 것은 아마도 그 경고인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새해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정치투쟁을 넘어서 모든 대립이 상호진화하여, 젊은이를 살리는 새 사회 건설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그런 희망의 대토론이 아래로부터 각계각층에서 조직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06.12.26 ⓒ 최원식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