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법관은 무엇으로 사는가
조광희 / 변호사
영화 〈도가니〉, 나경원 전 서울시장 후보와 관련된 '기소청탁' 논란, 영화 〈부러진 화살〉 등으로 법원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은 어느 때보다 증폭된 상황이다. 그 와중에 대법원장은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법관은 성직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부러진 화살〉의 소재가 된 재판의 합의과정을 공개한 뒤 징계를 받고 현재 정직 중인 이정렬 판사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이 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누구의 삶을 말씀하시는지? 조용기 목사님? 김홍도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 문정현 신부님? 명진스님?"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본의 아니게 이루어진 이 짧은 대화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이정렬 판사는 아마도 이 땅의 어떤 성직자들은 '성직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아닌 다른 방식의 삶, 특히 속세의 기준에 비추어도 바람직하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으리라. 그럼에도 그 질문은 동시에 '법관의 삶'에 대한 가혹한 질문이기도 하다.
'성직자와 같은' 법관의 삶이란
'성직자와 같은' 삶을 지향하는 법관이라는 직업은 동시에 결혼정보회사에서 선호하는 세속적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누구나 알다시피 법관은 학업성취가 매우 뛰어난 학생이 선택하는 가장 실용적인 직업이다. 그런데, 가장 실용적인 선택을 한 그들이 이제 갑자기 '성직자와 같은 삶'이라는 가장 비실용적인 태도를 지표로 삼는다. 그리고 이 모순되어 보이는 행위는 본인의 주관적 선의와는 별개로 '과연 얼마나 진실한 것일까'라는 시민들의 의혹을 견뎌야 한다.
생각해보면, '성직자와 같은'이라는 표현은 중립적인 심판자로서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주체가 마음을 준비하는 태도다. 그러한 지향은 소중하다.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왜 지겨우리만큼 자주 선언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비밀이란 말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비밀은 공공연하게 선언된다. '성직자와 같은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거듭 선언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 그 삶이 '성직자와 같은' 삶에서 계속하여 미끄러지고 있기 때문이며,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이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성직자와 같은 삶을 지향하는 법관'이라는 주체는 '조국을 위해 몸을 던지는 군인'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검사'라는 주체와 유사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가치를 위한 절대적 헌신'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군인의 이상은 '용감함'이지만, 누가 적인지 스스로 규정하지 못한다. 그는 누가 적인지에 대해 명령을 받고, 그 적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연합군이라 하더라도 대적하여야 한다. 검사의 이상은 '범죄와의 전쟁'이지만, 무엇이 범죄인지 스스로 규정하지 못한다. 그는 무엇이 범죄인지에 대해 하명을 받고 그 범죄가 민주화운동이라 하더라도 척결해야 한다. 법관의 목표는 '중립성'이지만, 무엇이 법인지는 스스로 규정하지 못한다. 그 법이 유신치하의 긴급조치라 하더라도 적용해야 한다.
즉 이러한 주체들은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한다고 하여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들에게는 그 보답으로 적지 않은 사회적인 댓가(권한, 사회적 인정, 연금, 국립묘지 등)가 주어지는 동시에 매우 엄격한 위계질서에 의해 개별행동이 금지된다.
'그들만의 리그'가 영원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명제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 것이 금지된 직업이지만,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력이 필요하고, 직업의 안정성이 '사법권 독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의하여 보장된 사람들이 법관이다. 가장 세속적인 잣대를 사용하는 결혼정보회사에서 그들을 최우량고객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어떠한 선험적인 명제도 거부하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 '날것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법관'은 가장 불가능한 직업이 된다.
'가능한 한 올바른 법'이 주어지는 현실, '판단의 독립'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공동체에서는 법관의 직무가 그나마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이 남루할수록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법은 "나는 실정법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했어"라고 독백하는 것이며, "나는 '성직자와 같은 삶'을 추구했어"라는 방법론적인 태도 뒤로 숨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사법적 현실은 그것으로 해결되지 못한다.
이제 현명해진 시민들은 법관이 '법'을 '법대로' 적용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심하고 있다. 법관이 실용적으로 직업을 선택했던 그 태도를 여전히 견지하면서, 은밀하게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한 것이 아닌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재벌, 석방되는 부패정치인, 잡혀가는 노동자 그리고 묵살되는 진실을 매일같이 목격하면서도, 법관이 '주어진 법을 묵묵히 적용하는 성직자'이기는커녕 '잘못된 당대 현실의 적극적 협조자'가 아닐까 의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이제 시민들은 공동체의 99%에 해당하는 자신들이 1%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왜 하소연을 해야 하는지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치와 법을 바꾸면 그 1%를 심지어 기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012.3.14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