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위기에 빠진 진보정당의 출구는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통합진보당, 아니 진보정치세력 전체가 최대의 위기에 빠졌다. 과거처럼 정치적 탄압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통합진보당은 이번 총선에서 진보정당사상 가장 많은 의석수를 달성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득표율에서 2004년 총선 결과에 못 미쳤고 울산, 창원 등 전략지역에서 패배했다. 진보신당은 해산의 위기에 놓였다.
특히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순번을 정하는 당내 투표에서 여러가지 선거부정이 저질러진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지도부 총사퇴의 위기에 빠졌다. 더구나 계파갈등으로 이제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고 그 파장은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정체성'보다는 '지역기반'의 문제
20 대 80, 아니 상위 1 대 99의 격차가 오늘날처럼 심각해진 적이 없는 이 마당에 진보정당이 승승장구해도 시원찮을 텐데, 치명상을 입고 비틀거린다는 사실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반공이데올로기의 효과나 거대여야 대결의 선거구도, 소선구제, 적은 비례대표 의석수 등이 진보정당의 약진을 가로막는 사회적 제도적인 장벽으로 남아 있지만 이번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이 거둔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권위주의 정권 이후 금속 노동자 출신 룰라가 두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재임 중에도 최고의 인기를 누린 브라질의 경우와 유사한 노동운동의 과정을 거친 한국의 예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노동자 밀집 거주지역이라서 진보정당 후보의 가장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울산과 창원의 사례를 보면, 통합진보당이 13석을 얻었지만 실질적으로 진보정치는 더 후퇴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분석과 평가가 나왔다. 총선을 앞두고 무리하게 통합진보당을 결성한 사실, 야권 단일화에 대한 과도한 기대, 반MB 위주의 선거전략이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점, 진보정당들 간의 분열과 통합진보당의 지도력 부재(거제), 무원칙한 광역의원 사퇴(울산 동구, 창원성산) 등의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지역의 후보들이 얻은 득표율이 2004년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득표율보다 낮았다는 점을 보면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이 책임있는 노동자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노동' 혹은 '계급'이 빠진 통합진보당의 정체성과 선거전략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는다.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다. 통합진보당 자체가 노동자성을 탈각했고 야권 단일화를 승리의 보증으로 착각한 이 지역 통합진보당 후보들이 노동자들을 투표장에 나오게 하는 데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분열된 상태로 각각의 후보를 내고, 후자가 노동자성을 선명하게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후자가 별로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현실정치나 이상이냐' '정권심판(교체)이냐 진보세력 독자성 강화냐'의 논란에 또다시 빠져드는 것은 비생산적이다. 그래서 나는 당의 정체성이나 중앙의 선거전략보다는 이들 진보정당의 사회적 기반, 즉 노동정치의 토대인 노조운동이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노조가 지역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점이 구조적 패인이라 보고 싶다.
대중이 사라진 자리, 기성정치의 논리가 채워
즉 운동세력이 제도정치권에 들어가면 당선을 위한 정치공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원칙과 방향 그리고 대중적 기반이 없이 그 길로 들어서면 만년 소수파 신세를 면할 수 없거나 어설픈 제도정치 흉내 내다가 더 큰 패배를 자초한다는 사실을 지난 20여년의 한국 진보정당 운동사는 보여주고 있다. 진보정당은 오직 대중동원을 통한 새로운 정치실험을 통해서만 입지를 마련할 수 있는데 기성정치의 게임의 방식을 따르면 덫에 빠진다.
통합진보당에 '노동'이 없다는 말은 노동이 이념으로서 아니라 '세력'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노동운동이 정규직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노조가 정당지지 후보지지 외에 어떤 일상적 정치활동도 하지 못했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특히 노조 혹은 노동정치 활동이 지역의제나 사회적 의제에 의미있는 대응이나 실천도 하지 않은 채 선거정치에 뛰어든 이 현실에서 진보정당이 뿌리 내리기는 어렵다. 결국 한국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민주노총의 취약성과 무능력이 이 문제의 진원지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위기는 당권파의 구태의연한 행태와 계파갈등에서 비롯한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87년 이후 형성된 노동세력이 학생운동 출신의 80년대식 민족자주 노선, 패권주의적 조직운영 방식을 제압할 수 있는 사회세력으로 형성되지 못했으며, 일상적 실천과 비전 제시를 통해 조직노조 혹은 진보정당이 99%의 다수자는 물론이고 1700만 노동자들의 믿을 만한 우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진보'의 의미를 재구성할 때
현재 진보정당의 위기가 50년대 조봉암과 같은 지도자가 나온들 극복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조나 노동자 대중조직이 사회운동을 통해 검증된 노동정치가를 길러내고, 그들을 통해서 집단적 이익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 때만 진보정당이 제대로 설 수 있다. 그것에 앞서 ‘진보’라는 말도 이 마당에 새롭게 정의해야 할 것 같다.
2012.5.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