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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본질과 해법

문정인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스웨덴 웁살라대학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평화학파'(East Asia Peace School)가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1910년 이후 100년 가까이 조성되어온 '북구 평화’(Nordic Peace)를 모델로 하는 이 학파는 "왜 냉전 종식 이후 동아시아 지역이 상대적으로 장기간 평화상태를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주요 연구주제로 설정하고 있다. 50년대 한국전, 60년대 월남전, 70년대 중국-베트남전 등 대규모 전쟁으로 점철되어온 동아시아 지역이 90년대 이후 놀라울 정도의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와 민주주의 확산에서 찾고 있다. 탈냉전 이후 이 지역에서 국가 간 무력충돌로 인한 살상자 수가 극소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경험적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최근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영토분쟁의 성격을 보면 '자본주의 평화론' 및 '민주주의 평화론'에 기초한 이들의 주장에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파워나 경제적 이익보다 역사인식에 연계된 민족정체성이 국가 간의 협력과 갈등을 결정짓는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세계화와 지역주의의 대두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아직도 주권과 영토에 기초한 '웨스트팔리아'적 국제관계가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독도(일본명 타께시마·竹島)와 센까꾸(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둘러싸고 한·일, 중·일 간에 전개되고 있는 영토분쟁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분쟁의 기원엔 일제 침략전쟁이

 

한동안 비교적 잠잠하던 이들 영토분쟁이 왜 이 시점에서 불거져나온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는 영토분쟁의 성격을 먼저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독도 사례를 보자. 현존하는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독도는 한국 고유의 영토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독도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엄밀히 말해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치른 침략전쟁이었고, 일본은 1905년 1월부터 이 전쟁을 빌미삼아 경성에 자국 군대를 진주시키는 동시에 한반도의 철도부설권과 울릉도의 산림채벌권을 챙겼다. 그리고 2월 21일에는 독도를 자국 영토로 만들어 시마네현에 편입했다.

 

사실상 무력으로 독도를 강탈한 것이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통해 얻은 점령자로서의 독도에 대한 권리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주권까지도 부정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여기에는 1951년 8월 딘 러스크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가 한국정부에 보낸,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서한이 한몫을 했다. 미국도 현 독도분쟁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센까꾸열도 문제 역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시모노세끼조약 체결을 통해 타이완을 병탈했다. 센까꾸열도는 이 과정에서 일본에 편입됐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센까꾸열도의 섬들은 19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3조에 의거 오끼나와의 일부로 간주돼 미국의 신탁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타이완으로 도피한 국민당정부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중국 공산당정부로서는 이러한 결정에 외교적 항의를 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1972년 5월 미국이 오끼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센까꾸열도도 같이 넘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동북아 영토분쟁의 근저에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집단기억을 국민 전체가 아직도 강하게 공유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수록 더 거세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이야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은 편이지만, 센까꾸열도는 일본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다. 아편전쟁 이후 150년이란 기나긴 굴욕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이 영토에 대한 주권회복이야말로 불행했던 과거의 청산인 동시에 국민적 염원의 성취인 것이다. 특히 중국이 세계 제2의 대국으로 등극하면서 이러한 염원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한·중·일의 적대적 제휴관계

 

물론 모든 국가는 영토의 온전성(territorial integrity)을 지켜야 하는 헌법적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을 법하다. 독도와 센까꾸열도에 대한 영유권은 관할 수역의 확대를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최근 행태는 국내정치의 파행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현금의 일본정치는 '1955년체제'로 규정되던 자민당 하의 안정적 정치구도와 거리가 멀고, 노다 총리를 포함, 대부분의 일본 정치지도자들은 전후 세대에 속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판에서의 생존이며,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들에 해가 되는 포퓰리즘적 행동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 또는 애국주의적 정서에 호소, 잃어버린 실지(독도)를 회복하고 기존의 영토(센까꾸)를 고수하는 것이 국내정치적 지지 확보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선거 때마다 영토 문제가 불거져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장기불황, 사회적 일탈현상, 그리고 리더십의 부재 등은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 경향을 한층 더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도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의 정보보호협정과 군수지원협정 체결을 통해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의 토대를 갖추겠다고 했던 이명박정부가 왜 일본에 그렇게 각을 세우는 것인가? 국내정치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3년 전부터 독도 방문을 준비했다고 하니 이대통령의 독도 사랑을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방문의 시기는 다분히 국내정치적으로 계산된 것 같다.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4.6%가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지지했는가 하면, 8월 13일 19%였던 이대통령 지지율도 17일에는 28%로 올라갔다. 그래서 일본 측이 이대통령의 최근 대일 행보를 정권말 레임덕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폄하하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의 대일 강경태도도 국내정치 변수에 의해 크게 좌우되고 있다. 10년 주기의 지도자 교체를 앞두고 있는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민족주의 정서에 편승하여 국내정치적 정통성과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한․중․일 3국 모두 과거사, 영토, 그리고 민족적 정체성을 국내정치에 이용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들 간의 '적대적 제휴'가 단기적으로는 국내정치적 효과를 가져다줄지 모르나 중․장기적으로는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크게 저해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전향적 태도가 우선이다

 

사실 현재 상항을 그냥 방치하면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러면 해법은 있는가? 무엇보다 일본이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를 둘러싼 한․중․일 3국 간 '적대적 제휴'의 진원지는 항상 일본이었다. 일본이 이 두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과거사를 한국과 중국이 수긍할 수 있도록 청산할 때 이 적대적 제휴의 악순환이 단절되고, 그 반대급부로 일본은 이 지역의 존경받는 지도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국기주의(國旗主義)를 넘어서 지역주의로 가야 한다. 지역통합을 통해 국경의 의미가 무의미해질 때 영토 문제는 희석되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비정치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파우스트적 흥정을 해서는 안된다. 영토 문제를 빌미로 한·중·일 3국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적대적 제휴관계를 구축하고 갈등의 악순환을 구조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중·일 시민사회가 연대하여 선동적 정치인과 언론에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영토분쟁이나 과거사를 둘러싼 갈등이 한·중·일 3국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인질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2012.8.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