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탈북자와 표현의 자유
동명숙 / 동국대 북한학과 3학년
나는 올해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살아온 지 십년이다. 그동안 참으로 무수한 질문을 받았다. "북한에서 진짜 사람들이 굶어죽나요?"부터 "인육을 먹어봤나요?" "지하 교회가 정말 있나요?"라든가, 심지어 "북한과 남한이 전쟁을 한다면 어느 편에 서실 건가요?"까지 실로 기상천외한, 헤아릴 수 없는 질문 세례를 받으며 살아왔다.
들었던 말들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너희(탈북자)는 6.25를 일으킨 인민군의 후손이니 지난날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와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는가? 오래도록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말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나보니 삼팔선 북쪽이고, 태어나보니 삼팔선 남쪽이 아니던가?
경계에서 바라보는 남과 북
하지만 원치 않게 북한에서 태어나 생애 전반기를, 그리고 남한에서 중반기를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남과 북의 경계에서 양쪽을 바라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67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제 식민통치의 치욕도, 동족상잔의 아픔도 함께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이다. 해방 전에는 먹고살기 어려워서, 또는 독립운동을 하느라 간도나 만주로 떠나갔으며 6·25의 참변을 겪을 때는 이념에 따라 북으로, 또 남으로 한많은 유랑의 세월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역사는 교과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흐른다.
북한에 비해 남한은 확실히 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표현의 자유, 선거의 자유 등 미처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누리고 있는 자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반면 북한은 원천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된 나라다. 오로지 당과 수령을 위해 한목숨 기꺼이 바칠 충성과 맹세를 표현할 자유만(이것도 자유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스럽지만) 허용되는 것이 오늘날 북한이다.
통일과 한반도와 관련한 공부를 하다보니 닮은 듯 다른 남과 북의 문제점을 발견한다. 일례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에 입국한 2만 4천여명 탈북자들에게는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대한민국에서 살게 해준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자유만 실제 허용된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남한사회에도 나름대로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어요"라며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순간부터 배은망덕한 자로 낙인찍혀 매도당하는 것이 남한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탈북자들은 남한사회가 듣고 싶어하는 말, 즉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먹고살게 해주었으니 입 다물라?
'표현의 자유'는 대한민국의 엄연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에게 과연 얼마나 어디까지 허용되고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규정한다. 헌법에 의하면 원래부터 탈북자는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명한데, 이중적인 잣대나 시각으로 탈북자를 바라보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북한에서는 왜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는가요?" 이런 질문도 거의 수백번은 받아보았다. 똑같은 논리다. 북한정권에서는 배급제도와 무상치료, 무료교육으로 혜택을 베풀었으니 사람들은 당과 수령의 은덕에 오로지 감사해야 할 뿐이고, 불합리한 체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조금도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도 북한정권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탈출한 탈북자들을 가리켜 '민족의 배신자'니 '혁명의 변절자'니 하며 온갖 악담을 퍼붓고 있지 않은가.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생존권을 책임져야 하는 국가의 의무는 도외시한 채 말이다.
먹고살게 해주었는데 비판을 한다는 것은 도리를 모르는 행동이라는 북한식의 황당한 논리가 남한사회의 탈북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개인의 가치관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답게 2만 4천명 탈북자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당당히 허용되고, 그들이 남북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존재하는 문제들에 대해 정당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을 때, 또 그러한 문제들이 공론화되어갈 때 남과 북이 하나로 되는 그날은 더 빨리 다가오지 않겠는가?
2012.9.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