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 ‘희망2013’을 찾아서
백낙청 / 《창작과비평》 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연말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헌법에 따른 국민의 결정이니만큼 존중해 마땅하고 승자에게 축하를, 패자에게는 위로를 전하는 것이 도리다. 그중 내 마음이 먼저 가는 곳은 아무래도 패배의 아픔과 허탈감에 젖은 이들께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쪽이다.
국민은 훌륭했다
그분들이 '우리 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의가 어느 한쪽의 독점물일 수야 없지만, 정의감이 드높고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며 불안하더라도 희망찬 미래를 선택하겠다는 사람들이 패배한 편에 훨씬 많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은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냈다. 분단체제의 기형적인 정치지형임에도 야당 후보는 DJP연합이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같은 이질적 세력의 도움 없이 투표인구 48%의 지지를 받았고 1470만 표라는 기록적인 득표를 했다. 민주통합당이 잘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문재인 후보 또한, 비록 차출된 정치신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력이나 개인적 득표력이 탁월하달 수 없었다. 오로지 그를 찍는 것이 대의에 더 부합한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판단해서 만들어낸 성과인 것이다.
국민들이 훌륭했기에 패배는 더욱 쓰라리다. 정치권 안팎을 막론하고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다는 사람이라면 국민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 자신부터 반성하고 성찰할 일이며, 서로의 아픔을 최대한으로 달래주려 노력할 때이다. 특히 아픈 정도를 넘어 삶 자체를 버리고 싶은 절망감에 빠진 분들이--실제로 며칠 사이에 5명이 절망 속에 죽어갔다--어떻게든 참고 견딜 수 있도록 공감과 위무의 손길을 뻗어야 할 터이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90% 안팎의 높은 비율로 정권교체를 지지하고도 좌절한 데 더해 영남지역의 '묻지마 새누리당' 투표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들먹여지는 호남인들에게도 특별한 위로를 전해야 옳을 것 같다. 지난 총선 때 영남의 67개 의석 가운데 새누리당 아닌 후보가 당선된 곳이 고작 3군데(전체의 5% 미만)인 데 비해 호남 30석 중 4석(전체의 13% 남짓)이 비민주당인 사실에서도 보듯이, 호남은 민주당의 전통적 아성이면서도 '묻지마 민주당'과는 거리가 엄연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민주당보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에 대한 지지가 더 높았던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부산 출신 문재인 후보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보냈고, 결과적으로 '경상도보다 전라도가 더 심하지 않냐'는 힐난까지 듣게 된 것이다. 지역간 통합과 화해를 위해서도 정확한 인식과 진심어린 위로가 필요한 대목이다.
승자에 대한 기대와 주문
아무튼 박근혜 당선인에 대한 축하에 인색할 생각은 없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나는 당선 직후의 신년칼럼에서부터 새 정부와 각을 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대선 직후에 서둘러 할 일들」 창비주간논평 2008.1.1.). BBK와 도곡동 등 엄중한 도덕성 문제가 걸려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당선인의 주된 정책 대부분이 결코 그대로 실현되게 방치해서는 안될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 기획이 그랬고, 남북관계의 파탄을 불러올 게 뻔한 '비핵 개방 3000'이 그랬으며, MB판 '줄푸세'에 해당하는 '비즈니스 프렌들리' 친재벌노선이 그랬다.
박근혜 당선인의 경우는 그 점에서 퍽이나 대조적이다. 그는 야당과 시민사회가 주장해온 갖가지 의제들--정치쇄신, 복지와 경제민주화, 남북관계 개선, 국민통합 등--을 자신이 실행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심지어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시대교체를 이룩하겠다'고까지 했다. 아, 이건 바로 '2013년체제론' 아닌가! 그런데도 솔직히 나는 기쁘다기보다 기가 찬 느낌이었고, 박 후보 지지세력의 체질이나 후보 자신의 성향으로 보아 그 좋은 공약들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선이 되고서 '약속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실패를 예단하고 미리 악담을 할 이유가 없다. 대통령의 실패가 나라에 도움이 될 것도 아니다.
실제로 과반수 득표로 당선됐고 여당이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대선 공약의 이행은 대통령의 의지에 크게 달린 문제다. 특히 야당의 공약과 겹치는 대목이 많은 걸로 아는데, 이런 공약들을 초당적 합의로 처리한다면 굳건한 사회적 토대로 남을 수 있다. 남북관계 개선만 하더라도 야당은 정부가 더 많이 나가주기를 바라는 형국이니만큼, 박 후보가 공약대로 남북대화와 인도적 대북지원을 재개하면서 신뢰를 쌓아 북측 최고지도자와의 만남까지 성사시킨다면, 이는 보수진영 출신 대통령의 이점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국민적 동의에 기반한 남북관계 발전'이 될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알아서 잘해주겠지 하고 기다리는 것은 민주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일단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무조건 돕고 봐야 한다는 것도 진정한 나라사랑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노예근성의 발로일 수 있다. 공약 가운데 좋고 나쁜 것을 엄격히 가리고, 좋은 공약의 확실한 이행을 다그치며, 그 약속을 뒤집거나 나쁜 공약을 실행하려는 시도를 매섭게 비판해야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작업의 큰 몫을 맡은 제1 야당이 아직 혼미상태인 데다 시민사회에서 그런 기능을 일차적으로 떠맡은 언론계와 지식인사회의 풍토가 이명박정부 5년을 거치면서 극도로 황폐해져 있다는 점이다. 선거를 앞두고 김종엽(金鍾曄)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명박정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이미 축적된 민주화의 제도적·문화적 성과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해야 했던 데 비해, 만일 당선된다면 박근혜는 그런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이, 이명박정부가 잘 닦아놓은 역진(逆進)의 길 위에 있는 셈이다."(김종엽 「아직 깨지지 않은 박근혜에 대한 환상」, 창비주간논평 2012.12.17.) 이번 선거의 민의가 박근혜 대통령이 그리 해도 좋다는 신호라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당선인 본인이나 선거철을 맞아 더욱 거침없이 활개치고 나선 고비용·저품질 인생들이 그렇게 오해할 소지는 충분하다. 역진을 막기 위한 시민사회의 지루한 진지전과 때로는 불꽃 튀는 기동전이 불가피할 듯싶다.
'희망2013'의 또 다른 의미
원래 '희망2013'은 '승리2012'를 전제한 구호였다. 그것은 그런 전제조건이 달성되었더라도 실현이 담보되는 목표는 아니었는데, 선거승리조차 못했으니 '희망2013'은 실종의 위기에 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 실종한 것인가? 바깥에서 실컷 두들겨맞고 집에 들어와서는 '정신적 승리'를 주장하는 아Q(루쉰의 소설 주인공 阿Q)처럼 돼서는 곤란하지만, '승리2012' 이후에도 '희망2013' 작업이 험난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듯이 패배 이후의 '희망2013' 또한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 한층 복잡해지고 다소 흐릿해졌을 따름이 아닐까?
물론 2013년 새정부 출범과 더불어 '2013년체제'의 건설이 힘차게 시작되리라는 꿈은 접어야 한다. 그러나 벌써부터 '희망2018' 또는 '희망2017'로 쉽게 목표를 바꾸는 대선 위주의 발상에 빠지다보면, '승리2012'에 집착한 나머지 선거승리마저 놓친 2012년의 실패를 되풀이할 위험이 크다. '희망2013'의 남은 불씨나마 어떻게든 살리려는 노력 없이 5년 후에 시원한 꼴을 보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대선은 양대 후보가 모두 '시대교체'를 약속하는 가운데 역대 최다 유권자가 참여한 선거였다. 여당 지지표 중 상당수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2013년부터 세상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실현을 위해 낡은 세력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고 그들의 정권연장을 허용한 것이 뼈저린 좌절이며 '희망2013'의 일대 위기다. 그러나 2013년 2월이 획기적인 출발점이 못 되고 그 실행의 경로가 더 복잡해졌을 뿐, 2013년 이후에 대한 국민적 염원이 있고 여기에 그 염원을 감당하려는 사람들의 한결 끈덕지고 담대하며 유연한 활동이 더해진다면 '희망2013'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실행경로가 복잡해졌다는 것은, 집권세력이 확실한 구심점을 제공하지 못한 채 그 실현작업의 일부를 새누리당 대통령의 약속이행에 맡겨야 하고, 다른 일부를 협력과 견제의 양면작전을 슬기롭게 펼치는 원내야당들에 기대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둘 중 어느 것도 안심할 대상이 아니다. 특히 민주통합당의 행로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문제다. 하지만 시민들이 바로 이런 불안요인을 감안해서 자신의 몫이 그만큼 커졌음을 자각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진전일 수 있고, 각자 처한 위치에서 자신의 과제를 찾아내리라 본다. 결국 가장 본질적인 것은 새시대를 설계하고 준비하며 자신과 외부세계의 낡음을 끊임없이 닦아내는 시민 하나하나의 노력이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원리를 따라 큰 희망을 일궈내는 일이며, 그것은 미래의 어느 시기가 아니라 당장에 수행되어야 할 과제다. 2013년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은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2012.12.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