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무상보육, 책임공방이 아닌 국가 책임 강화로
제갈현숙 /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2012년 대선이 특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국가복지에 대한 정당 간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복지정치 경쟁은 시장만능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낙수효과에 대해 유권자들의 불신이 팽배한 데서 촉발되었다. 더이상 경제성장과 시장을 통한 부의 분배라는 선거 패러다임의 유효기간이 연장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복지에 대해 매우 수동적이었던 보수정치세력은 그들의 정치패러다임에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새누리당의 복지공약은 민주당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졌고, 보편적 복지를 전면 수용하는 듯했다. 다만, 증세 없는 국가복지 확대의 실현 가능성에 제기된 의문에, 모든 것은 준비됐고 후보자는 꼭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담과 새누리당의 복지정치는 정권인수위 과정부터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복지공약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부정
박근혜정부가 대선 당시 유권자들로부터 가장 큰 지지를 받은 공약은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제공한다는 것과, 일·가정 양립 및 출산율 제고를 위해 국가가 영유아·아동 보육에 대한 전면적인 책임을 지겠다고 한 무상보육 정책이었다. 두 정책 모두 복지할당원리 중 보편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고령사회에 필수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박근혜정부는 지난 8개월 동안 국가재정의 건전성을 명목으로 이들 공약에 대한 자기부정을 끊임없이 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상보육과 관련된 주된 논점을 검토해보자.
8월 중순 서울시는 “대통령님, ‘보육사업과 같은 전국단위 사업은 중앙정부가 책임지는 것이 맞다’고 하셨던 그 약속, 꼭 지켜주십시오. 무상보육비 국비지원 비율을 높이는 영유아보육법 개정에 힘을 모아주십시오”라는 광고를 시작으로 박근혜정부의 복지공약 이행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지자체가 중앙정부를 향해 이러한 광고를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 핵심에는 무상보육 재원에 대한 국가보조율 증대 요구가 있다. 2013년, 무상보육이 전면 시행됨에 따라 애초 예산안보다 1조 4천억원가량의 정부예산이 증액되었고, 지방정부 역시 7100억원가량을 초과 부담하게 됐다(서울시의 경우 무상보육 전면시행으로 수혜 대상자가 기존의 두배로 증가했다).
중앙정부도 회기년도 내에 증액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지만, 지방정부의 어려움은 더욱 심각하다. 서울시의 경우 9월초 2000억원의 지방채를 발행해서 무상보육 재원을 마련하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했지만, 근본적인 처방책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서울시를 포함한 지자체장들은 계류 중인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의 시행을 요구해왔다. 개정안의 핵심내용은 국고보조율을 현행 50%(서울시만 20%)에서 70%로 20%포인트 인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10%포인트만 인상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지자체들은 수용하지 않았다.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은 지난해 11월 여야 합의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여전히 계류 중이다.
보육재정의 국가 책임이 공공성 강화의 토대
지자체들이 보육재정에 대한 국고보조율 인상을 요구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2005년에서 2012년 사이 중앙정부의 복지재정 증가율은 9.0%인 반면, 지자체의 복지재정 증가율은 13.3%로 재정부담의 증가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세의 핵심인 취득세율 인하로 지방세수가 2조 4000억원 감소할 것이 예상되는 등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지방자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국가복지의 재정부담을 지자체의 독립성 강화라는 명목으로 회피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실질적인 책임을 외면한 정권의 정치적 액션에 불과하다. 더욱이 무상보육을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우면서 정작 책임 국면에서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통령의 정치는 무책임의 전형이다.
일·가정 양립 및 출산율 높이기는 초고령시대를 맞이할 한국사회의 중대 과제이다. 한때 우리 사회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매우 사적인 영역의 책임으로 보았다. 그러나 소득의 불안정성 심화, 여성의 역할 변화, 노동력 확보의 어려움, 인구고령화 같은 변화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개인의 의지나 책임의 범주를 넘어섰다. 국가의 노동 및 사회 정책에 따라 한 나라의 출산율이 변화하고, 일·가정 양립을 위한 지원정책의 질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노동시장 참여 정도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무상보육은 인생의 출발지점에서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유산처럼 아이에게 그대로 계승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은 보육의 공공성 강화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2013.9.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