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한중 인문유대’ 관견
최원식 /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예서제서 '인문유대' 이야기가 들린다. 한·중이 공유하는 문화자산을 기반으로 한 민간교류를 심화함으로써, 수교 20주년(2012)을 즈음하여 오히려 경색된 한중관계를 타개할 열쇳말로 떠오른 인문유대는 외손뼉이 아니라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전문한 바에 의하면 한국에서 먼저 제안하고 중국이 화답하는 과정을 거쳤다는데, 애초에는 '인문동맹'이었다는 것이다. '한중 인문동맹'? 이는 사실 과하다. 인간 또는 사회의 지극한 밝음을 지향하는 인문의 이상을 상기할 때, 정치·군사적 측면이 우선되는 동맹은 인문과 상호배제적이기조차 하다. 하여튼 대화를 통해 두 나라가 '한중 인문유대'에 합의한 점은 새로운 20년을 향해 출범하는 한중관계의 미쁜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해도 좋겠다.
신뢰의 교류에서 정치적 이상의 실천으로
이명박정권의 한미동맹 일변도가 한중관계의 악화를 야기한 점은 널리 인정될바, 중국언론이 '정냉경열'(政冷經熱, 경제는 뜨거운데 정치는 차갑다)이라고 비판해도 할 말이 많지 않다. 최근 한중관계를 요약하고 있는 이 말을 좀더 직설적으로 풀면, 한국이 장사는 중국에서 하면서 정치·군사는 미국과 짝짜꿍한다는 것이다. 이 이중성은, 무슨 현학적인 정치외교이론을 끌어다 붙일 것도 없이, 한마디로 부끄럽다. 한미동맹과 한중관계의 조화라는 박근혜정부의 외교목표 아래 제출된 한중 인문유대는 이 점만으로도 염치의 회복이라고 할진대, 요는 인문유대가 단지 수사(修辭)로 떨어지지 않도록, 나아가 '동맹'을 교정할 실질적 기틀로서 작동할 수 있도록 그 안팎을 자상히 살필 일이다.
옌볜(延邊)대 동포학자의 지적이 떠오른다. 내실화의 요구로 제기된 인문유대가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 장애요소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두 나라 사이에는 역사문제를 비롯해서 탈북, 북핵, 혐한(嫌韓) 등등, '공자왈맹자왈'의 인문으로 쉽게 가릴 수 없는 지뢰밭이 널려 있는 형편이다. 교류가 확대되면 관계도 저절로 좋아지리라는 기능주의에 대해, 핵심은 역시 정치가 풀려야 한다는 입장의 신기능주의가 대립한다는 정치학의 훈수를 감안하면, 인문유대가 인문주의라는 기능주의로 한정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절실하다. 그 거대한 베이징올림픽(2008)의 모토가 '녹색올림픽' '과학올림픽'과 함께 '인문올림픽'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의 '인문'이 가리키는 바가 혹 대국의 꿈에 봉헌된 일종의 장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던 것이다.
인문유대가 그저 '정냉경열'의 문화 버전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정치협상이 반듯이 요구되거니와, 그렇다고 정치협상으로부터 시작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난제를 앞세우는 것은 깨자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민제(民際)적 교류를 축으로 삼는 낮은 단계의 유대로 시작해서 어느정도 신뢰가 축적되면 정치협상을 가동하는 게 순리가 아닐까 싶다. 이러구러 양자를 병행하다가, 구극에는 한중 인민이 정치적 이상을 함께 실천하는 높은 단계의 유대로 나아가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터이다.
동일성을 넘어 차이에 주목하는 미래로의 유대
그렇다면 낮은 단계의 인문유대를 인문주의가 아니라 옳은 정치로 가는 출발로 삼을 공리(公理)는 무엇인가? 문화유산의 공동성에 기초한다는 상식을 존중하되 그보다는 차이에 더욱 주목하면서 유대를 추구하는 방향이 어떨까 싶다. "학습의 적(敵)은 자기만족"이라는 마오 쩌둥(毛澤東)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공동성의 발견은 한중 사이에서는 특히 오해와 제휴할 자기만족에 그치기 십상이다. 한중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공동성, 공통성, 동일성이 존재한다. 이 목록을 지루하게 확인하는 것은 재미도 적을뿐더러 영접해야 할 타자성을 지우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쉬운 일이 될 터인데, 공동성이 아니라 차이를 교류의 축으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종요롭다. 물론 그 차이는 왕년의 식민주의와는 절연한다. 배타와 지배의 구실이 아니라 상호이해로 인도하는 차이, 그리하여 발견 자체가 상호무지를 확인하는 기쁨이 되는 그런 차이야말로 어떤 분쟁에도 불구하고 한중관계를 반석으로 받칠 민제적 화해의 지렛대로 될 것이다.
인문유대를, 확인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함께 창조할 미래로 투기(投企)할 때 한중관계가 특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 비로소 보통의 지평으로 들어올려지겠거니와, 그때 인문유대가 중·미만 중시하는 대국외교, 북을 포위하는 반북연대, 일본을 배제한 반일연맹, 그리고 무엇보다 남북관계 및 국내정치의 실패를 보전(補塡)하는 대체제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창조적 도구로 될 터이다. 내치를 보호하는 게 외교다. 한국인의 중국관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다시 볼 계기가 될 한중 인문유대의 구극 역시 한국사회가 남북관계의 진전을 바탕으로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고 더 우애로운 공동체로 진화하는 데 있을진대, 과거가 우리의 현재/미래를 간섭하게 허용하지 말자.
2013.9.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