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기초연금 논쟁의 본질: 유럽식 복지국가의 꿈이 사라진다
김연명 /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지난 대선에서 한국의 보수는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진보의 보편주의 복지정책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은 이 변화의 상징이었다. 재벌 손주에게 주는 '공짜급식'과 이건희 회장에게 주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비효율의 극치라고 비판하던 보수의 모습을 상기하면 그 변화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기초연금 논란에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한국의 보수는 보편주의를 수용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사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는 아직도 철 지난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기초연금안은 신자유주의의 전형
박근혜정부 기초연금안의 핵심은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데서 공공부문의 역할을 줄여나가겠다는 정치적 메시지이다.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전형이다. 그 실행방안은 두가지로, 첫째는 현재의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20만원으로 인상해서 지급하지만 현재 50대 이하의 젊은 층에게는 국민연금 가입기간이 길수록 20만원 이하로 삭감해서 장기적으로 조세에서 부담하는 기초연금의 크기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시점에선 대부분의 노인이 기초연금 20만원을 받아 보편주의적 외형을 띄지만 시간이 갈수록 20만원을 받는 노인의 수는 감소하여 선별주의로 변하게 된다.
두번째는 기초연금의 실질가치를 점차 떨어뜨려 국가재정 부담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가령 정부안대로 기초연금 20만원을 임금상승률이 아니라 물가상승률에 연동하여 인상하면 통상 임금상승률보다 2~3%가 낮은 물가상승률 때문에 기초연금의 실질가치는 점차 하락하고 국가에서 조세를 통해 부담하는 기초연금 재정의 크기는 줄어든다.
자식들이 보내주는 생활비가 가장 큰 노후소득
노인들의 소득은 한국의 국민연금이나 기초연금같이 공공부문에서 지급되는 공적연금소득, 민간보험회사에서 연금상품을 구매하면 지급되는 개인연금소득, 그리고 기업연금에서 나오는 퇴직연금소득, 추가로 자식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구성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유럽이나 중부유럽의 복지국가에서 노인소득의 대부분은 공적연금소득에서 나온다. 국가에서 주는 공적연금만 있으면 품위있는 노후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때문에 민간보험회사나 기업연금에 과도하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노후소득에서 시장과 기업의 역할이 매우 약하고 국가의 역할이 매우 큰 것이 유럽식 복지국가의 특징이다. 반면 자유주의 복지국가로 불리는 영국과 미국의 노인들은 국가에서 지급받는 연금은 극히 적고 개인연금이나 기업연금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노후생활을 영위한다. 즉 이곳들은 국가의 역할이 매우 약하고 시장과 기업의 역할이 매우 큰 복지국가이다.
우리나라 일반적인 노인들의 소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자식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이다. 노인가구는 월평균 27만원 정도를 자식들에게서 받고 있다. 국민연금이나 기초노령연금에서 받는 소득은 월평균 20만원 정도이다. 개인연금이나 퇴직연금은 내는 돈은 막대하지만 돌려받는 연금은 거의 무시될 정도로 적고 앞으로도 크게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의 노인빈곤률이 45%로 OECD 평균보다 세 배가 높은 이유는 공적연금액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연금, 즉 기초연금의 크기를 점차 줄여나가려는 박근혜정부의 기초연금안이 그대로 시행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한국사회 복지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박근혜정부의 기초연금안은 노인소득 중 공적연금소득, 즉 공공부문의 책임을 점차 줄이는 원리로 설계되어 있다.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등 공공부문에서 지급되는 연금액이 충분치 않으면 사람들은 민간보험이나 기업연금(퇴직연금)에 더 의존하게 된다. 시장과 기업의 역할이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민간보험과 기업연금의 규모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매우 크다. 국민들이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에 내는 보험료가 한해에 60조원 정도인데 민간생명보험에 내는 보험료가 70~80조원에 이른다. 90조원 이상이 쌓여 있는 퇴직연금도 이미 삼성생명 등 민간보험회사에로 통제권이 넘어갔다.
따라서 박근혜정부의 기초연금안이 시행되면 공적연금의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시장과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이는 쪽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정부의 기초연금안에는 보수의 본질이 담겨 있다. 한국의 보수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굳건히 자신들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진보의 유력한 대안 중 하나인 유럽식 복지국가의 전망은 어떻게 될까? 공적연금은 재정규모가 워낙 커 복지국가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박근혜정부의 기초연금안은 얼마 되지 않는 공적연금액을 장기적으로 더 낮춰 한국사회를 공공부문의 비중이 극히 적은 영미형 복지국가로 구조화시킬 것이다. 최근 몇년간 논의되면서 주목받은 '유럽식 복지국가의 꿈'은 일장춘몽이 된다. 연대와 평등이 사라진 미래의 한국사회에 남는 것은 극심한 노후빈곤과 불평등뿐일 것이다.
2013.10.1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