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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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화이, 우리 시대의 오이디푸스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소설가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에서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을 오이디푸스와 연결 지음으로써 특수한 시대적 삶을 보편적 운명의 격자 위에 올려놓는다.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하지만 다분히 논리적인 조작의 흔적을 에피그램 형식이라는 빗자루로 쓸어내고 있는 이 소설에서 시대의 징후와 보편적 운명은 그렇게 깊숙이 얽혀들지 않는다. 「화이」는 그와 다르다. 훨씬 더 상업적인 영역에 속하는 영화작품이고 감독 또한 전작과 달리 상업적 성공을 시도했음에도 보편적 운명과 시대의 징후가 완연하고 깊게 교차한다.

 

아버지라는 상징을 이어받는 아들

 

「화이」의 줄거리는 이렇다. 화이(여진구 분)는 석태(김윤석 분)를 비롯한 5명의 범죄조직 '낮도깨비'에 납치돼 과거를 모른 채 자란다. 그는 사실은 원수인 “아버지들”에게서 각각의 특기를 배우며 크는데, 그중엔 살인 기술도 있지만 음악과 미술도 있다[미술을 전수하는 것은 아버지들에게 붙잡혀 사는 영주(임지은 분)다]. 그러던 중 석태는 화이에게 마침내 살인 임무를 부여하는데, 그 대상은 화이의 친부이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수행한 화이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숨겨진 과거를 알게 된다. 그리고 분노 속에서 아버지들을 죽인다.

 

줄거리를 보면 금세 화이가 우리 시대의 오이디푸스임을 알 수 있다. 왜 우리 시대인지는 잠시 뒤로 미루고 왜 오이디푸스인지부터 살펴보자.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두가지 요소의 결합이다. 첫번째 요소는 두명의 아버지다. 한 아버지는 양부고 다른 아버지는 친부다. 보통 아이들이 현재 아버지가 양부라고 믿는 이유는 (가난이나 아버지의 남루함 같은) 비참한 현실을 부인하려는 아들의 심리 때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거기엔 그 이상의 심리적 진실이 포함돼 있다. 부자관계란 본질적으로 입양에 의해서 수립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낳은 존재가 아니라 그가 아들로 ‘받아들인’(adopt) 존재다. 그러므로 부자관계는 상징계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이며, 아들은 그 상징적 질서 안에 오려 붙여진 존재다.

 

두번째 요소로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 신탁이 있다. 이 살부(殺父)의 신탁 또한 심리적 본질은 상징적인 것이며, 그 내용은 아버지의 계승이다. 이 상징적 계승의 길은 물론 순탄치 않다. 왜 달리 살지 않고 아버지를 계승해야 하는가? 왜 아버지를 단순히 계승해서는 안되고 진정으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계승의 신탁으로 도피하려는 자의 파국적 운명을 친부를 죽이게 되는 드라마로 풀어낸다.

 

‘우리 시대’라는 거울로 오이디푸스 비틀기

 

많은 오이디푸스적 드라마가 그렇듯이 「화이」에는 몇가지 변형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화이가 양부가 아니라 양부'들' 아래서 자란다는 것, 그리고 친부뿐 아니라 양부들 모두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변형들이 역사적으로 그래왔듯 「화이」에서도 그 변형 속에 우리 시대의 표정이 스며있다.

 

양부가 여럿이라는 것은 오이디푸스의 내적 의미를 강화해서 보여준다. 화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모두에게 상징적 아버지는 여럿이다. 상징적 아버지는 우리가 자아이상으로 수용하는 모든 존재이므로 하나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이의 양부들은 사회문화적 우주 전체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들은 화이를 유괴했다. 강렬한 입양이다. 하지만 역으로 아이 편에서 보자면 그것은 난폭하기 그지없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상징적 질서로의 편입이 이렇게 입양을 넘어 납치로 느껴질 만큼 폭력적이 된 것이다.

 

아이는 적고 부모는 과잉인 화이의 가정은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유괴가 될 정도의 입양이 부모 편에서 모든 재능을 물려주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입시학원과 예능학원의 가르침을 두루 훌륭하게 소화해낸 영재처럼 화이는 악기와 자동차와 칼과 총을 모두 잘 다루고 그림마저 잘 그린다.

 

공동의 범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하지만 「화이」는 교육적 열정이 넘치는 아버지들과 그것을 힘겹지만 잘 받아내는 순한 아이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가르침을 통일하는 한가지 가르침이 문제다. 아버지들 가운데 석태(김윤석)는 너도 아버지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진성(장현성)은 너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성의 방을 채우는 음반들과 그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팔뚝은 진성 자신이 이미 다른 삶에 실패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진성의 길은 닫히고 석태의 길만이 화이 앞에 열린다.

 

그렇다면 석태가 요구하는 아버지와 같은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토대가 범죄라는 것, 공동체가 공동의 범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 다시 말해 괴물을 삼키고 괴물이 되라는 것이다. 화이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친부살해를 경유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경우 「화이」의 경로는 『오이디푸스』와 다르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의 계보에는 외설적인 충동이 흐른다. 라이오스는 어린 시절 망명했던 피사의 왕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납치하고 강간했다. 그는 또 아들에게 죽음을 당하리라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아들 오이디푸스를 버렸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취한다. 요컨대 『오이디푸스』의 친자관계에는 상징적 질서 수립 이전의 원시 가부장적 충동이 흐른다.

 

고통과 살인의 뫼비우스 띠

 

이에 비해 「화이」에서 결정적으로 외설화되고 범죄화된 곳은 친부와의 자연적 세계가 아니라 양부들의 세계다. 상징적 질서로의 진입이 날카로운 베임을 요구하지만 그 댓가로 질서와 가치의 세계를 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화이」에서는 상징계 내부를 형성하는 양부들의 세계 자체가 외설적인 범죄로 피 칠갑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징계 자체가 주는 구원의 힘이 여기엔 없다.

 

오이디푸스 이야기처럼 여기서도 아들이 저지르는 살부의 죄는 아버지의 죄로 소급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라이오스의 자리를 떠맡는 것은 친부가 아니라 양부 석태다. 그런데 일종의 반전을 겪으며 석태의 범죄 또한 입양의 고통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화이 이전의 화이였고, 화이는 석태의 반복으로 보이는 것이다.

 

석태는 화이의 친부이자 시멘트 회사의 사장인 임형택의 아버지가 운영한 보육원 출신이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는 매우 적게 말한다. 낮도깨비들 모두가 보육원 출신임은 충분히 암시되지만, 석태가 왜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는지, 그 괴물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화이의 가정과 보육원의 대칭성은 선명하다. 보육원은 한 아버지(원장)와 아들들의 세계다. 이 세계가 괴물에 시달리다 낮도깨비가 된 아버지들과 한 아들의 공동체로 전도된다면 보육원 자체가 이미 괴물의 세계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불어 영화는 화이의 진짜 친부는 사실 양부 석태일 가능성마저 암시한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화이가 석태를 살해할 때 양부와 친부의 구별 자체가 무화된다. 『오이디푸스』의 세계가 법과 문화의 상징계와 충동의 실재계 사이의 준별이 희미한 고대적 비극의 세계라면, 「화이」는 상징계와 실재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세계인 셈이다.

 

노골적인 외설 사회의 징후를 바라보며

 

이토록 참혹한 「화이」의 세계는 공적 질서와 법 자체가 노골적으로 외설화되고 사회 자체가 범죄 위에 세워진 것임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다. 우리 사회 자체가 그리 되고 있다는 징후인 것이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국책사업에서 수상쩍은 이익을 챙기며 민간인 사찰을 지시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언필칭 국가인권위원회가 모든 책임을 방기하는 그런 사회, 감사원이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감사 결과를 뒤집는 사회, 추악한 대통령에 이은 대통령이 선거조작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회, 엄정한 수사를 지시한 검찰총장을 추문으로 쫓아내는 사회,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나 초원복국집 사건의 주역이었던 자가 제왕적 비서실장으로 암약하는 사회, 국가정보기관의 장이 비밀문서를 마구 공개하고 거기서 일하는 요원들이 여론을 조작할 뿐 아니라 그들이 백주 대낮에 얼굴을 드러내고 국회에 의원을 체포하러 가는 사회, 공중파 TV를 비롯해 매스미디어의 다수가 쟁점을 은폐하고 논란을 축소하고 모든 정치적 갈등을 소모적 정쟁으로 묘사하는 사회, 대학 총장을 지냈다는 자가 죽은 독재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회……

 

나는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8개월 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적 질서가 파괴되고 법이 외설적 권력 행사의 수단이 되며 공직자와 공적기관 들이 후안무치한 작태를 보인 사례를 팔이 아플 때까지 쳐내려갈 수 있다. 그런 사회의 오이디푸스가 바로 화이인 것이다. 순진한 눈망울로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에 일부는 진성처럼 당혹스러워 할 것이고, 일부는 기태(조진웅 분)처럼 안타까워 할 것이고, 또 일부는 동범(김성균 분)처럼 냉소적일 것이다. 또는 범수(박해준 분)처럼 기계적으로 묵묵히 일에 몰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계를 향도하는 이가 석태인 한, 우리의 아들들은 모두 화이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2013.10.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