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언론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 시사저널 사태, 그 절망과 희망
이문재 | 시인, 전 시사저널 취재부장시사저널 사태의 핵심은 단순하다. 한 문장이다. '편집권은 어디에 귀속되는가.' 선택지는 둘로 압축된다. 편집권은 편집국에 있다. 아니다, 경영진에 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이 빤히 보인다고 해서 해결책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양자택일이 더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시사저널 사측과 노조는 사태가 발생한 지 8개월이 지나고 있는데도 서로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제법 알려졌거니와, 사태의 발단은 한건의 기사였다. 지난해 6월 16일, 시사저널 경제팀 기자가 작성한 삼성그룹 실세 관련 기사가 최종 편집을 마치고 인쇄소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튿날 사장(발행인 겸 편집인)이 편집국장과 상의 없이 기사를 삭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2006년 6월 27일자 시사저널(870호)은 경제기사 3면이 빠진 채 발행됐다.
'짝퉁 시사저널'의 탄생
뒤늦게 기사가 누락된 사실을 인지한 편집국장은 즉각 사표를 냈다. 항의성 사표는 그 다음 날 바로 수리되었다(통상 이같은 성격의 사표는 즉시 수리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편집국 기자들과 사측은 틀어지기 시작했다(이번 사태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다. 지난 몇년간 예열기가 있었다. 메이저 일간지 출신인 사장과 시사저널 기자들은 자주 부딪쳤다. 사장이 보기에 기자들은 지나치게 진보적이었고, 기자들이 보기에 사장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었다).
이후 사태는 기자들의 항의와 농성, 노조 결성(2006.6.29), 부분파업(2007.1.5), 전면파업(1.11)으로 이어졌다. 사측은 지난해 12월 초순, 시사저널 편집국 외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시사저널 기자들과 뉴스를 보는 눈이 다른) 비상근 편집위원 10여명을 위촉했다. 1월 5일 기자들이 하루 동안 부분파업에 들어가자, 비상근 편집위원들이 기사를 작성하고 편집한 시사저널(1월 8일자, 899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898호까지 목차에 실려 있던 기자들의 이름은 이때부터 빠졌다. 시사저널 노조(기자)와 시사저널 정상화를 촉구하는 독자들은 비상근 편집위원들이 제작한 시사저널을 '짝퉁 시사저널'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항의와 농성은 기자들에 대한 중징계로 이어졌고, 기자들은 파업으로 맞섰다. 상황은 나아가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경영진이 보기에) 부정적 기사를 쓰거나 프로그램을 제작한 기자와 PD 들이 제소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짝퉁 시사저널'을 비판한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들도 사측으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파업 80여일을 맞고 있는 4월초 현재, 시사저널 노조와 사측은 아직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사저널 사태는 일단, 편집권은 어디에 귀속되는가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이 논란은 팽팽하다. 편집인을 겸하고 있는 발행인은 자신의 기사 삭제가 최종적인 편집권 행사라고 주장한다. 기자들은 편집권은 편집국에 있다고 주장한다(지난 1월 30일 한국사회언론연구소와 한국기자협회가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6.7%가 편집권은 편집국에 있다고 답했다). 편집권은 경영진과 편집국이 공유하는 것이라는 제3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시사저널 사태를 한국언론과 한국사회 전체를 배경으로 놓고 보면, 편집권의 귀속 '위치'를 따지는 논란은 자칫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편집권 논란에 드리운 빅브라더의 그림자
광고가 주 수입원인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가장 큰 압력단체는 광고주, 즉 기업이다. 국내 최대의 광고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성이다. 청와대나 국회를 두려워하는 대중매체는 이제 없지만 삼성 눈치를 보지 않는 매체는 없다. '청와대는 못 빼도, 삼성은 뺀다'라는 말이 있듯이, 삼성의 대언론 정책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시사저널 사태가 메이저 신문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여러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이번 사태가 삼성과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삼성과 관련한 기사가 아니라 다른 기업이나 정치권, 혹은 다른 이익단체를 비판한 기사가 빠졌다면 사태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편집국 안에서 고성이 오가거나, 누가 사표를 냈다가 일주일 뒤쯤 다시 출근했을 것이다. 갑자기 기사가 빠지거나 들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편집권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편집권의 경계가 국경선처럼 분명할 까닭도 없다. (내 경험에 따르면) 편집권은 편집권과 관련된 구성원들의 ‘이성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시사저널 경영진이 편집국과 이성적 합의의 전통을 갈고 닦아왔다면, 이번과 같은 '물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사저널 사태가 보여주는 한국언론의 명과 암
시사저널 사태는 몇가지 측면에서 매우 새롭다. 우선 편집권을 둘러싼 거의 최초의 파업이라는 사실이다. (내 기억으로는) 동아투위나 조선투위 이후, 그러니까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언론은 편집권을 놓고 파업을 벌인 적이 거의 없다. 그만큼 언론자유가 확장되기도 했지만, 그와 똑같은 속도로 언론인들이 '월급쟁이'로 전락했다. 1990년대 이후 기자 사회는 급속도로 세속화됐다. 기자가 아니라 어느 신문사 소속 몇호봉으로 변한 것이다. 자사 이기주의가 팽배해져 기자협회나 언론노조 활동도 예전과 같지 않다. IMF 이후 대부분의 기자들에게 편집권은 생존권 뒤로 물러나 있다.
둘째는 '짝퉁 매체'의 발행이다. 기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급조된 외부 필진(경영진 측에서는 정식 발령을 낸 편집위원들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에 의해 시사저널이 3개월째 발행되고 있는 것이다. 시사저널 기자들과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시사모)은 이같은 비정상적인 제작이 정기독자와 애독자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제호는 그대로이지만, 편집방향(색깔)이 바뀌었으므로 더이상 예전의 시사저널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소비자운동이 꿈틀대고 있다는 것이다. 주류 언론이 외면하고, 지식인사회가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마당에 시사저널 독자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독자들은 지난해 10월 16일 시사모(공동대표 고종석·이재현)를 발족하고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시사모는 '나도 고소하라'(시사저널 사장이 시사저널 사태와 관련해 '불리한' 기사를 쓴 기자와 PD를 제소하자, 시사모 회원들이 자발적 피소운동을 벌이고 있다)라는 캠페인을 비롯해,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을 시작했다. 기자들이 복귀하여 시사저널이 정상적으로 발행될 것에 대비해 독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시사모 회원수는 3월말 현재 17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시사저널 사태는 절망이자 희망이다. 언론노조의 한 간부가 말했듯이 앞으로 이같은 사태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편집권 수호 문제는 민주화운동이나 농민운동처럼 사어(死語)가 되어버렸다는 자괴감이 퍼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편집권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이성적 합의인 편집권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대중매체의 편집권은 민주주의의 사활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편집권 없는 언론, 언론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편집권이 어디에 귀속되느냐는 질문은 사태의 정곡을 비켜갈 수 있다. 지금 언론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언론에 과연 '이성적 합의로서의 편집권'이 있는가. 만일 그런 편집권이 있다면, 한국언론은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려는 의지가 있는가라고 캐물어야 한다.
시사저널 사태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적지않은 연관이 있다. 세계화 열풍이 불고, 구제금융 시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한미FTA 정국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민주주의의 급격한 퇴보이다. 민주 주의는 시장의 논리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민주주의는 시장논리라는 새로운 종교 앞에서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정치권과 선거제도 안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거처에 가시 울타리를 쳐서 가두는 유배형)되어 있고, 대다수 국민들은 '경제적 공포'에 떨고 있다.
미국 출신의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가 아니라 경제성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경제성장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고 있다. 민주주의가 오히려 경제발전의 장애물이라고 여긴다(참여정부나 정치인에 대한 반감과 삼성그룹에 대한 호감을 비교해보라).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논리를 대칭적 관계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시장의 반인간적·반생명적 작동방식에 적극 개입하고 간섭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정책과 비전으로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온다 해도 양극화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공유해야 한다. 이같은 역할은 벌써부터 언론에게 주어져 있었다. 언론 또한 독자로부터 위임받은 저 신성한 권한을 끊임없이 자임해왔다.
편집권 없는 언론, 언론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해보자. 시사저널 사태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언론의 편집권 위축, 민주주의의 박제화, 경제권력의 발호가 겹쳐져 시사저널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앞의 설문조사에서 기자들의 81.4%가 시사저널 사태는 자본의 논리에 편집권이 침해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78.1%가 이를 언론계 전반의 문제라고 인식했다). 여기까지는 분명 절망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미디어 소비자들이 모여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이 스타트라인을 그었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우리는 저 1975년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기억한다. 1986년에 전개됐던 범국민적인 시청료 거부 운동을 잊지 않고 있다.
미디어 소비자운동의 돛이 올랐다
언론학자 김기태 교수는 자신의 저서 《시청자 주권과 시청자 운동》에서 "자본주의하에서 대중매체의 경영진은 일반대중들의 직접 참여에 의해 선출된 대표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대중매체의 내용을 결정하는 데 일반대중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장치나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적고 있다.
시사모 회원들이 벌이고 있는 캠페인은 단지 시사저널이라는 품격있는 주간지 하나를 되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시사모는 파업중인 기자들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을 넘어서고 있다. 시사모가 시도하고 있는 미디어 소비자운동의 궁극 목표는 언론이 언론다운 사회, 그리하여 민주적 가치와 질서가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어우러지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을 것이다.
2007.04.03 ⓒ 이문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