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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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로잘리나의 것은 로잘리나에게: 서울여성영화제 ‘이주여성 특별전’

신해욱ㅣ 시인

올해 서울여성영화제(4.5~4.12)에는 <이주여성 특별전: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라는 쎅션이 마련되었다.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스리랑카에서 레바논으로, 베트남에서 싱가포르나 한국으로 삶과 노동의 터를 옮긴 여성들의 이야기. 상영목록을 쭉 훑으면서 눈길을 끈 건 <이주여성이 만드는 여성영화 제작 워크숍>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1월 10일부터 27일까지 당진문화원에서 진행된 워크숍을 통해 제작된 작품 9편이라고 한다. 직접 그들의 눈과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이주여성 이야기를 접하면서 사람들이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대략 두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러브 人 아시아!>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드라마틱하게 구성해내는 ‘씩씩한 며느리’ 이야기. 저 워크숍 작품들이 대중매체에 소개되는 방향도 그러했다. 4월 11일자 한 신문에 마침 기사가 실렸는데, 제목이 <8인의 외국인 며느리들 '영화감독 됐어요'>였다. 스스로 만든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그들은 '며느리'인 셈이다.


이주여성, '씩씩한 며느리'와 인권 피해자 사이

다른 하나는 그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을 보여주는 이야기. 한때는 《한겨레》조차도 암내가 나지 않고 몸매가 세계 최고라는 둥 베트남 처녀의 장점을 줄줄이 나열한 결혼정보업체의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실은 적이 있다. 그러니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다룬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고발의 내용을 담고, 각성된 관객들이 이런 내용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중요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매매에 가까운 결혼 성립 과정(관련기사 창비주간논평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 편집자),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그 하중을 일방적으로 견뎌내야 하는 고통, 앞으로 2세들이 겪어야 할 차별 등에 대해 넓고 깊고 예리해지는 그만큼씩, 세상은 덜 폭력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만든 짧은 단편들은 이런 대체적인 '기대치'들을 비껴갔다. 그들은 지나치게 건강하거나 씩씩하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슬프거나 고통스럽지도 않았으며, 누군가를 비판하지도 않았다. 심심하고 무덤덤하게 집이 나오고 논과 밭과 하늘이 나오고 남편과 아이들의 얼굴이 나오고 고향 가족의 사진이 나온다. 그리고 서툰 한국어나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모국어가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한국말을 한국사람처럼 잘하고 싶습니다. 한국말을 잘 못해서 미안합니다. 한국에 와서 행복합니다. 앞으로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그것으로 끝.

나는 너무나 단순한 이 이야기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끈하고 명료하게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면 나중에야 어찌됐든 보는 순간에는 전부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태어나 12년을 한국에서 산 로잘리나가 밥 먹고 이 닦는 시간을 서툰 한국어로 아주 어렵게 소개할 때, 답답한 남편과 딸들이 대신해서 로잘리나의 말끝을 마무리해줄 때, 촛점이 맞지 않는 화면 때문에 눈이 아플 때, 내가 로잘리나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로잘리나의 한토막 삶이 아니라 로잘리나의 삶이 보여지거나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 자체다.

보여질 수 없는, 말해질 수 없는 삶의 진실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빈약하다. 한국어는 서툴거나 불가능하고 캠코더는 처음. 찍을 수 있는 건 집 주변의 풍경과 가족이 고작이다. 원하는 풍경을 담겠다고 차를 몰고 돌아다닐 처지도 아니고, 가족과 몇몇의 이웃 이외에 딱히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이 많고 인력이 풍부한 방송사에서는 베트남, 필리핀, 중국으로 날아가 그들의 고향 가족이 살고 있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아오겠지만, 그들이 '직접' 든 카메라 안에서 고향의 가족들은 흔들리는 사진으로밖에 소개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카메라 앞에 앉아서도 자기 자신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재료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역설적이게도 보여지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문학적 비유를 들자면 '행간'에 숨어 있는 것들이, 이 영화들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것 같다. 어색하게 편집된 단조로운 장면들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것들. '행복하다' '사랑한다'라는 말로는 포착될 수 없는 그런 것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이 영화들은 일종의 ‘결핍’이 만든 형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모든 '나의 이야기'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 대해, 당신이 나에 대해, 어떻게 '있는 그대로'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주여성 관련단체의 한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만난 키르키즈스탄 출신의 한 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때마다 어려움을 호소했다. 나는 한국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한국어로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 그래서 쉬운 한국말만 해야 해. 나는 나를 말하기가 어려워. 친구는 여덟살 난 아들과 이슬람 사제인 아버지에 대해 잘 말하고 싶어했지만 정작 말을 하고 나서는 그건 아니라고 하거나 고개를 갸우뚱거리곤 했다. 하지만 물론 이마저도 친구의 언어를 내가 얼기설기 구성해낸 것이니, 정말로 그런 뜻으로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역시 그건 아니라고 하거나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른다. 친구의 진짜 이야기도, 친구의 언어 바깥에만 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 찾은 소통과 위안의 방식

3분짜리 <그리움 그리고 꿈>을 찍은 베트남 사람 미미(Nguyen Thi Mong Tien)는 유일하게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을 떠가는 헬리콥터, 어둑한 시간의 텅 빈 도로, 날갯짓하는 물새, 베트남 거리의 사진 등을 통해 외롭고 슬픈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했고, 고향의 노래를 불러 설명을 대신했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 작품은 제 첫 작품입니다. 작품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자막이 올라간다. 미미는 즐겨 영화언어를 익힌 것 같고, 이 새로운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들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 같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는 이 영화가 정말 "첫 작품"에 불과하도록 또다른 시도를 하지 않을까 싶다.

5분짜리 <나의 천사들>을 찍은 보현(Nguyen Thi Ngoc Nga)은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는 미미와는 조금 다르게 카메라를 즐긴 것 같다. 함께 상영된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이번 작업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 (자기 작품 자체라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앉아서 혼자 말할 수 있는 시간 자체였다고 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몇년 동안 가슴속에 답답하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카메라가 들어준다. 그에게 카메라는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소통상대이다. 그러니까 소통상대가 아닌 우리가, 보현의 영화를 통해 그의 속내를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미미는 소통의 코드를 맞추어 자기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고, 보현은 자기 방식으로 자신을 위무하고자 한다. 타인의 입장으로 볼 때 마음이 편한 건 아무래도 미미의 방식이다. 어떤 세계를 이해하거나 읽어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은 참으로 불편하니까. 그러나 보현이 스스로를 위안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과, 타인이 보현의 삶을 엿보며 ‘이주여성’의 힘겨운 삶을 잠깐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별로 대답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 미미의 것은 미미에게. 보현의 것은 보현에게. 그리고 로잘리나의 것은 로잘리나에게.

2007.04.17 ⓒ 신해욱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