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유서대필’을 말한 자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이 사실에 어긋나다 못해 아예 사실과의 접점 자체가 없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그런 사실무근의 말들은 지시의 방향을 갈피잡지 못한 끝에 결국 경로를 되짚어 말한 자에게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거짓말이 지시하는 것은 다만 거짓말하는 사람의 어떤 욕망인 것처럼 말이다. 딱히 거짓말로 분류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리석은 사람이 책임을 따진다'(카드사 정보유출 사고 후 현오석 총리 발언)고 한 최근의 예도, 애초에 의도했던 국민의 어리석음을 일러주기는커녕 말한 사람의 어리석음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모든 헛된 소리의 마땅한 귀속처는 바로 그 출처이다.
우리가 권력으로부터 매일 듣게 되는 헛된 소리들은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렵다. 확실히 이런 일은 근래 더한층 늘어났지만 돌이켜보면 어느 하루에 생긴 변화가 아니라 면면히 내려오는 흐름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죽할까만 80년대를 대표하는 '광주폭도'가 있었고 내 세대가 실시간으로 경험한 '탁 치니 억 했다'도 있었다. 이런 말들은 어느 하나 일평생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90년대의 '유서대필'은 또다른 종류의 충격으로 기억된다.
분노와 슬픔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날조
다른 종류라고 하면 가령 이런 것이다. 80년대에 권력이 내놓은 헛된 말들은 혈관을 흐르는 피의 화학적 성분이 바뀌는 듯한 강렬한 분노를 자아냈고 이 분노는 그 강렬함만큼이나 깊은 슬픔을 동반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같은 분노와 슬픔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직접적인 탄압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권력이 내놓은 터무니없는 거짓이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것임을 알 수 있었고, 거짓의 억압을 받고는 있지만 온전히 살아 있는 진실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기에 겉으로 더더욱 억압적인 권력자, 적어도 80년대 후반의 헛소리들은 이런 이미지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서대필'이라는 거짓은 단순히 진실의 억압이기보다 세상에 없는 진실의 날조였고 따라서 진실의 이해와 실현을 향한 열망을 오염시킬 목적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우리의 분노와 슬픔을 겨냥했으므로 그것이 일말의 사실과도 관련 없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더 충격적이었다. 너무 악의적인 나머지 분노마저 뒤틀리게 하여 극히 수치스럽고 비뚤어진 무언가를 보았을 때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착잡함을 불러왔으며, 누군가의 두뇌에 이런 발상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당혹감으로 마땅히 표현되어야 할 슬픔마저 굴절시켰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서대필'이라는 말 자체가 사회적 감수성에 깊은 흔적을 남긴 하나의 증상이었다.
시간이 지나 불행히도 그와 유사한 헛된 소리들을 수차 경험한 지금은 '유서대필'에 담긴 비뚤어짐의 성격을 분명히 알 것 같다. 뒤늦게 이룩한 민주주의의 한걸음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세력의 반격,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이 어떤 악의와 왜곡을 거쳐 표현된 사회적 증오의 형태. 그것은 기득권이 길러낸 이데올로그들의 활약이 한층 정교해지는 지점에서 나온 말의 폭력이었고, 거기에서 절묘한 수라도 찾아낸 양 득의만만한 인물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23년의 한,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나
그 악의와 왜곡을 온몸으로 받아낸 강기훈씨가 지난 13일에야 겨우 무죄판결을 받았다. 1991년 노태우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주었다는 죄목으로 구속된 지 23년 만이고,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한 이래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구속과 징역이라는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유서대필'로 재현된 권력의 비뚤어진 증오를 겪으며 그가 얼마나 많은 삶의 고비를 넘나들어야 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싸움 자체를 변질시키는 일에 맞서 싸우는 일이었기에 강기훈씨가 감당한 진실은 매순간 잔인하게도 그라는 인간 전부를 투여할 것을 요구했으리라. 재판이 끝난 후 그는 자신과 똑같이 아파하고 삶이 뒤틀린 사람들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렸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싸움의 성격이 그러하기에 재판의 처음과 끝을 구성한 국과수의 필적감정은 마치 실제로 다툴 것이 있었던 것처럼 꾸며내는 허울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로부터 어떤 매듭도 지어지지 않는다. 검찰이 재상고할 경우 대법원까지 가야 하는 절차가 이어질 것이며 강기훈씨의 말대로 이 어이없는 법정다툼을 방조한 재판부의 사과와 반성도 받아내야 한다. 무엇보다 '유서대필'이라는 헛된 소리가 그 마땅한 귀속처로 돌아갈 일이 남았다. 머리로 그 발상을 떠올리고 입으로 그 말을 뱉은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게 이 말을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까?
2014.2.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