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의정(醫政)협의와 행정독재
정형준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작년말부터 원격의료, 투자활성화대책 철회 등의 기치를 내걸고 대정부투쟁을 시작했다. 원격의료는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아이콘으로 주창된 것으로, 막대한 비용에 비해 효과 및 안정성이 입증된 바 없어 이명박정부 때부터 도입이 논의되었음에도 국회 상임위를 한번도 통과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민간보험회사 및 IT기업들이 노리는 개인질병정보 수집 등에 매우 취약하고 종국에는 민간영역의 건강관리서비스 사업의 선결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어 사실상 의료민영화 사안이다.
여기에 박근혜정부가 작년 12월 13일 발표한 의료 부문 투자활성화대책은 '의료민영화 쓰나미'라 불릴 만하다. 영리 자회사 설립, 부대사업 확대, 병원 인수합병, 영리 약국 도입, 신의료기술 허가 간소화 등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정도의 의료민영화 정책이 포함되어 있다.
확산일로로 치닫는 의료민영화 정책
특히 영리 자회사는 투자자들에게 배당이 가능한 구조로 간다는 점에서 사실상 영리 병원의 도입 효과를 내게 된다. 2009년도 보건산업진흥원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체 병상의 6.8% 정도가 영리 병원화하면 연간 최대 2조 2천억원의 의료비 증가가 예측된다. 여기에 건강관리식품이나 화장품 판매, 병원 임대 등도 모조리 영리 자회사를 차려 할 수 있게 해준다면, 더욱 영리적인 의료행태가 확산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에 많은 시민들은 그동안 밥그릇 싸움에만 집착하던 의사들이 국민건강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칠 의료민영화를 반대하는 데 공감을 표명했다.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및 노동조합 등도 의협의 대정부투쟁을 일부 지지하고, 의협이 진지하게 정부의 일방적 의료민영화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이기에 의협은 상대적으로 쉽게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지난 1월부터 시작된 의사-정부(이하 의정) 협의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을 벗어난 논의사항이 여기서 합의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의사들이 정부기관에 고용된 노동자도 아니고 정부정책에 관여하는 관료들도 아닐진대 협상의 목표는 결국 정부정책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다.
박근혜정부는 이미 투자활성화대책을 통해 '전면적 의료민영화' 추진을 천명하면서도, 핵심 추진과제인 영리 자회사 설립 건은 법률 개정이 아닌 정부 가이드라인 수준에서 제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환자 편의를 벗어나는 부대사업 확대까지도 시행규칙 수준에서만 손을 보아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입법제도를 우회해서 행정부가 마음대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집행하려는 '행정독재'의 표본이다. 이러한 행정독재의 면모는 기존의 철도법을 개정하지 않고 자회사를 허가해 KTX 철도 민영화를 강행하려는 과정이나, '전교조 법외노조' 선언을 한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행정독재' 저지와 사회적 합의의 길로 나아가야
이런 측면에서 의협이 정부와 협상을 한다면 의료민영화를 위한 행정독재를 중지시키는 것이 주된 목표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의협은 정부와 협상을 하면서 두차례 모두 그것을 막아내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겨왔다. 대표적으로 이번 3월 17일 발표된 2차 의정합의에서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위원의 공익대표를 공급자와 가입자가 동수로 추천하기로 합의했다.
건정심 위원의 비율은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정해진 법률에 의거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단순히 의협이 정부와 합의해서 될 문제인가? 정부와 합의했다고 생떼를 쓰면 될 일인가? 여기에 각종 의료제도 개선 문제, 상담수가 신설, 상대가치 재조정 등 수많은 문제들까지 정부와 합의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대부분 행정부와의 조율이 아니라 사회적 기구를 통한 합의와 입법과정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의협은 박근혜정부의 무소불위 행정독재에 기댄 셈이다.
특히 그간 시민과 일반 의사회원에게 선전했던 원격의료와 영리 자법인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입법 및 추진계획은 그대로 둔 채 관련 시범사업이나 부작용을 반영할 협의체 등을 구성하는 수준으로 합의한 일은 사실상 정부의 의료민영화정책 추진을 지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의협이 의정합의를 발표할 때마다 의사들의 이익만을 챙기고 국민건강은 내동댕이치는 맞바꾸기를 했다고 지탄을 받는 것이다.
지난 3월 10일 의협의 하루 파업 때 많은 시민이 여러 불편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보낸 것은 파업을 통해 정부의 막무가내식 의료민영화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의협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의협이 협의하고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며, 의협이 막아야 하는 것은 바로 정부의 행정독재다. 이제라도 행정독재에 기대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모습을 버리고, 시민과 함께하는 협의와 합의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지금 의협이 진정 생각해야 할 것은 요구의 내용뿐만 아니라 요구의 방법이다.
2014.3.1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