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대박’ 통일을 위한 스파이론: 연극 「데모크라시」가 일러주는 것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다짜고짜 통일을 '대박'으로 선전하는 한편에서 되지 않는 가짜 서류로 간첩을 조작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사태는 어디 다른 곳에서라면 초현실적 부조리로 실감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에게 이 모순적인 조합은 익히 겪은 바 있는 고색창연한 현상이다.
통일대박론은 그 말이 표방하는 게 사실이라면 마땅히 진행되고 있어야 할 교류협력과 화해의 작업을 사실상 외면한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실제로 바꾸지 않기 위해' 벌이는 요란한 볼거리에 가깝다. 간첩조작사건 역시 혹시라도 누군가 실제로 바꿔보겠다고 나서는 일을 막으려고 공연히 벌인 푸닥거리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낡고 오랜 헛소동들은 현재 이루어져야 마땅한 변화를 억압하려는 권력의 욕망을 공통의 배후로 갖고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여전히, 그리고 사이좋게 살아남은 것이다.
평화를 추구하는 적, 임무를 잃은 스파이
최근 대학로 무대에서 상연된 「데모크라시」는 통일과 간첩이 진정 동시대에 부합하는 것이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일러주는 연극이다. 영국 극작가 마이클 프레인(Michael Frayn)의 작품으로 2003년 초연된 이 극은 냉전시기였던 1969년에서 1974년까지 서독 총리를 지내면서 동독과 소련 등 당시 동구권 사회주의국가들과의 화해와 평화를 도모한 이른바 '동방정책'을 추진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총리당선에서 실각까지를 다룬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학살희생자 추모비 앞에 헌화한 다음 무릎까지 꿇었던, 우리로서는 특별히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사죄장면을 연출한 이가 바로 그다.
이 인물의 삶이 남달리 극적인 것은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화해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정치행보뿐 아니라 동독 스파이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과의 '인연' 때문이다. 그려진 디테일들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은 아마도 의문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극은 브란트와 관계된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들 그리고 그의 인간적 자질과 고뇌를 쫓아가는 한편으로 브란트와 기욤의 기묘한 공생관계의 추이를 흥미진진하고 설득력있게 배치한다.
사민당에 입당하여 운 좋게 브란트의 최측근 자리까지 진입한 기욤은 당연하게도 새로 들어선 브란트 정권의 기밀을 염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욤에게 이런 일반적인 스파이 행위를 결정적으로 '교란'한 것은 브란트의 정책이 동독을 적대시하고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름지기 적의 의도를 미연에 탐지해 이쪽을 향한 공격을 좌절시키거나 적의 약점을 간파해 이쪽의 공격을 성공시키거나 하는 따위의 일이 스파이 본연의 임무이자 존재 이유라면, 그 적이 적대행위엔 통 관심이 없고 화해와 평화를 추진할 때 스파이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기욤이 실제로 수행하는 임무란 이미 공개적으로 추진되는 정책들을 새삼 간파하는 데 있지 않고 브란트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진심으로' 하려 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된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브란트의 의중과 고민을 확인한 기욤은 그 역시 진심이 되어 정치적 반대세력과 사민당 당내 정치가 고비고비 브란트를 끌어내리려 할 때마다 그의 편에 서서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한다. 영화 「타인의 삶」이 탁월하게 그려 보인 감시 대상에 감동하는 감시자의 모티프가 여기서도 재연되고 있다.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다
지난해 한국 무대에서 초연된 이 연극을 올해 또다시 상연하기로 한 극단의 결정에 전혀 의문이 들지 않을 만큼 우리의 오늘에 비추어 이 극이 갖는 현재성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더욱이 어느 때보다 그깟 진심은 내팽개쳐지기 쉬운 선거철을 앞둔 마당이다. 사민당의 오랜 막후로서 신념보다 권력이 중요한 능구렁이 헤르베르트 베너(Herbert Wehner)의 존재마저 부러워 보이는 건 드라마니까 그러려니 싶기도 하지만, '친애하는 벗들이여, 연민을 보여주는 용기를 가집시다'라는 말이 선거구호로 쓰이는 대목에서는 질시의 탄식을 누르기 힘들다.
무엇보다 통일을 '대박' 비슷하게라도 만들려거든 없는 스파이를 잡아다 공안몰이를 할 일이 아니라 있는 스파이라도 '평화의 도구'로 써야 함을 일러준 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런 '스파이 사용법'의 열쇠는 많은 것을 실제로 바꾸고자 했던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있었다. 상대를 향한 적대와 흑막이 없으면 굳이 숨겨야 할 기밀도 사라질 것인데 간첩조작 자체가 최대 기밀이 된 우리의 경우는 시민을 겨냥한 적대행위가 기밀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그런 점에서 스파이 사건을 다룬 이 연극의 제목이 「데모크라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많은 사안들이 그렇듯 통일을 위한 스파이론의 유일한 근거도 '더 많은 민주주의'인 것이다.
2014.3.26 ⓒ 창비주간논평